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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의 쓸모 Nov 20. 2022

서평 _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

정의, 조금은 불편한 시선

이 책을 보다 보니 또 다른 궁금증과 생각을 자아내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_ 생각하지 않는 삶에 도사리는 악]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한 이 책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유대인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다고 한다.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일원이었던 아이히만을 처형한 것이 정의에 어긋나는 듯한 늬양스를 띄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나치나 독일에 우호적인 내용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도 독일계 유대인이다. 이방인인 내 눈에는 재판이 대해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재판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단지 전후의 과정과 각본이 이미 짜인 듯한 쇼로 비친 재판에 대해서 그렇게 우호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대민족의 입장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관점이 달갑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아이히만을 납치한 것은 비록 그가 인류의 적이라는 이유에서만 이루어진 것이지 그가 유대인의 적(hostis iudaeorum)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의 체포의 적법성을 정당화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361p


이스라엘 법정은 아이히만에 대한 처벌을 “유대인 문제”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반인륜적”이라는 프레임으로 유대 민족을 넘어 전 인류 차원에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아이히만의 범죄행위를 차치하고 봤을 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함으로써 전 세계의 공감과 동의를 얻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재판은 비유대인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오직 이스라엘에서만 유대인은 안전하고 명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고자 했다. 56p


방청객 중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고, 유대인과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인도 없었다.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슴속 깊이 알고 있으며, 그래서 어떤 교훈도 배울 자세도 갖춰져 있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의 결론을 이끌기 위해 이 재판이 필요하지도 않은, 나처럼 유럽에서 이주한 중년과 노년의 ‘생존자’들이었다. 56p


하지만 이 재판이 과연 정의로운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전 인류”라는 가치를 부여했다고 하지만, 위 문구들을 보면 이스라엘이 부여한 정당성에도 약간의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홀로코스트는 분명히 마음 아픈 일이다. 그 일을 직접 겪은(지금은 그들 중 생존자가 많이 남아 있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의 아픔과 트라우마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민족적 비극에 대한 트라우마가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것에 대해서도 갸우뚱하게 된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과 트라우마에 갇혀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 말이다.



인류라는 정당성을 부여한 심판은 어쩔 수 없이 “민족성“의 틀에 갇힌 듯 보이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민족적 감성과 비극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렇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재판은 결코 연극이 되지는 않았지만, 벤 구리론이 처음에 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 이루어졌다. 57


그리고 이 재판은 비극에 대한 심판에 그치는 것이 아닌 듯했다. 민족을 넘어 전 세계에 던지는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다.” 이것은 벤 구리론이 설정한 기조였고, 이를 하우스너 씨는 충실하게 따랐다. 69p


이들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인류애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반유대주의”라는 민족에 대한 증오에 대한 전 세계를 향한 경고로 보이기까지 한다. 야훼를 섬기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신감인 것일까. 


이러한 유대 민족의 정서적 배경에 근거했다고 하더라도 아이히만의 범죄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전쟁범죄에 가담한 인물이다. 그리고 결국 법의 심판을 받았다.



하지만 정의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심판의 절차도 과연 정의로웠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나 아렌트가 제기한 의문은 단순히 유대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아 보인다. 무엇이 정의인가. 민족의 관점에서 정의의 개념이 달라질 수 있다. 민족 반역자, 민족을 대항한 범죄자라 해서 정의 구현이라는 이름으로 그 과정이야 어떻든 상관없는 것인가?


유대인이 아직도 홀로코스트라는 민족적 감성에 빠져있다고 했지만, 사실 우리나라 역시 반일 감정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역사를 기억하는 것과 미래를 지향하는 것은 다르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은 다른 관점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생각된다. 한나 아렌트처럼 말이다.



반일 감정에 대해서 뿐만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이슈와 논란거리가 뉴스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 이태원에 있었던 일로 국가 전체가 슬픔에 빠진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는 민족, 국가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로 우리 곁에서도 수많은 논쟁을 일으킨다. 바로 “누구의 책임 소재인가”아는 질문으로 말이다. 다르기 말하면 “누가 잘못했느냐”로 말이다.



흔히 법에는 감정이 없다고 말한다. 법에는 감정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 법으로 판결하는 사람은 감정이 있다. 아이히만에 대한 판결에 감정적 요인이 작용했느냐 질문을 한다면, 적어도 한나 아렌트는 뭐라고 답할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그저 ‘악의 평범성’이라는 교훈만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의의 문제 앞에서 과연 무엇이 정의인지 와 그 방법에 대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에게도 똑같은 묻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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