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북쪽 끝, 왓카나이에서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홋카이도 제2의 도시, 아사히카와에서 하루를 쉬었습니다.
제가 있는 동안 아사히카와에는 폭설이 내렸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겨울이고 눈이긴 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눈이었습니다.
나중에 뉴스를 보니 당시 24시간 적설량이 41cm를 넘었다고 하더군요. 홋카이도에서도 기록적인 폭설이었습니다.
앞을 보기 어려울 정도의 폭설에, 다음날 움직여야 하는 철도 사정이 걱정이었습니다. 눈이 많이 오면 열차가 크게 지연되거나 취소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열차는 잘 움직였습니다. 열차는 작은 지연조차 없이 제 다음 목적지인 아바시리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홋카이도는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곳이고, 노선 사정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정시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일본 열차치고 홋카이도의 철도는 지연이 많은 편이기도 하죠.
그나마 제설과 인프라 유지에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이 정도 수준의 신뢰성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HBC홋카이도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JR 홋카이도는 지난 겨울 강설 대응에 60억 엔을 지출했습니다.
유지・관리에도 이렇게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데, 이 철도를 건설하는 데에는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홋카이도를 다룬 대중매체에서는 이 ‘개척 시대’의 어려움이 자주 주제로 등장하기도 하죠.
그리고 그 철도 건설의 실상은, 그렇게 도착한 아바시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바시리는 역사가 깊은 감옥이 있는 도시거든요.
아바시리 감옥은 1890년에 처음 만들어진 수용 시설입니다. 홋카이도에 개척사가 설치된 것이 1869년이었고, 이것이 홋카이도 도청으로 바뀐 것이 1886년입니다. 그러니 당시는 정부 주도의 홋카이도 개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홋카이도 북방 아바시리에 감옥이 설치된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도쿄에서 먼 외지로 수감자들을 보내는 동시에, 홋카이도 개척에 수감자들을 동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수감자들을 홋카이도 횡단 도로 건설에 투입했습니다. 춥고 가혹한 현장에서 별다른 보호 조치도 없이 작업은 계속됐습니다.
원시림을 뚫고 220km의 도로를 만드는 데 8개월이 소요됐습니다. 작업 현장에서 200여 명의 수감자가 사망했습니다. 동원된 수감자 6명 중 1명이 사망한 것입니다. 작업을 관리하는 간수 중에서도 사망자기 나왔습니다.
도로 건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방과 댐, 철도를 비롯한 건설 사업이 수감자가 동원됐습니다. 사망자의 발생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수감자 하나를 먹이고 재워야 하는 비용이 줄어들었을 뿐이니까요.
메이지 초기 일본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시대적 격변이 벌어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죠. 메이지 정부에 반대하는 사족들의 반란도 잇따랐습니다.
아바시리 감옥의 개설과 강제동원은 정치범과 사상범으로 포화 상태가 되어버린 감옥의 밀집도를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수감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를 데려오기도 했죠. 이런 노동자들은 현지에서는 다코(他雇)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다코 노동자는 알선업자들에 의해 임금을 받고 노동을 하러 온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계약 조건은 매우 불리했고, 노동 조건도 열악했습니다. 이들은 도주하지 못하게 사실상 감금당한 상태에서 노역에 동원되었습니다.
현장에서 사망한 이들은 별다른 처치 없이 현장에 매장했습니다. ‘철도의 목침 하나에 다코 한 사람이 묻혔다’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노동에는 물론 조선인이 강제 징용되기도 했습니다.
착취였고 학살이었습니다. 그렇게 철도와 도로가 만들어졌고, 농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개척’의 역사였습니다.
그사이 고통받은 것이 단지 수감자나 다코 노동자뿐이었을 리 없겠죠. 둔전병으로 뽑혀 온 군인들은 개척과 군사 훈련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주민들의 삶도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인에게 ‘개척’은 곧 탄압이었습니다. 1899년 일본은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을 제정해 아이누 문화를 강력히 탄압했죠.
이 법에 따라 아이누인은 일본 복식을 입고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일본의 국가 행사에 참여가 강제되었고, 덴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암송하도록 했습니다.
아이누인의 열악한 지위를 이용해 아이누인을 착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누인 여성에 대한 성폭행과, 아이누인 남성을 노역에 동원하고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일은 당시에도 빈번히 고발되던 참상이었죠.
바로 이러한 착취 위에서 홋카이도라는 ‘근대의 영토’는 만들어졌습니다. 근대란 언제나 그런 폭력성을 수반하며 오는 것일 테죠.
그런 의미에서라면, 홋카이도라는 섬을 상징하는 단 하나의 공간을 꼽으라면 아바시리 감옥을 골라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박물관 안내판에서 아바시리에서 전기가 처음 들어온 것이 아바시리 형무소였다는 사실을 보고, 저는 그리 놀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본은 그 착취로 만들어진 이 섬의 역사를 충분히 되돌아보고 있을까요? 근대성과 반드시 흡착되어 있는 이 폭력성을 직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박물관이 된 아바시리 감옥에서는 당시의 참상을 충실히 전하고 있습니다. 희생자에 대한 추모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그 ’개척‘과 착취를 주도한 이들조차 일본사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꼭 일본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근대라는 시대를 거쳐 온,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아바시리 감옥은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세계는 그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습니다. 근대의 불빛뿐 아니라 그림자까지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는지 묻고 있었습니다.
지난 한 해 바다 건너 한국에서 들려온 소식들을 찬찬히 곱씹어 봅니다. 저는 결국 그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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