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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더슈탄트 Dec 17. 2023

[일본] 04. 새로운 일본, 새로운 땅

 아바시리에서는 드디어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구시로로 향하는 길, 한 칸짜리 기차에는 기관사를 제외하고는 승무원이 아무도 없습니다.


 열차는 직원도 역사도 없는 무인역에 몇 번이나 섭니다. 그 역에서도 꼭 타고 내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홋카이도의 자연을 만끽하며 세 시간 반을 달렸습니다.


 구시로에 도착한 다음날, 다시 비슷한 한 칸짜리 열차를 탔습니다. 이번에는 동쪽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아침 차를 타고 두 시간여를 달리면 네무로 역입니다.


 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40분입니다. 그렇게 긴 길을 달려 도착하는 곳이 노삿푸 곶입니다. 일본 영토의 동쪽 끝이죠.


 동경 145도. 해가 긴 여름에는 새벽 세시 반이면 해가 뜬다고 합니다. 반대로 지금처럼 해가 짧은 겨울에는 오후 세시 반만 되어도 노을이 집니다.


네무로행 열차


 일본의 최북단, 소야 곶에 다녀온 것이 겨우 며칠 전이었습니다. 노삿푸 곶도 소야 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두 곳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최북단 소야 곶은 거센 바람이 있을 뿐, 고요한 마을이었습니다. 일본의 최북단임을 알리는 기념탑 한두 개가 전부였죠.


 하지만 노삿푸 곶에는 비석만 십수 개가 서 있었습니다. 2층 짜리 기념관도 몇 동이나 있습니다. 모두 정치적인 구호를 담은 것들입니다. 이유는 물론 일본의 ‘북방영토‘ 문제 때문입니다.


노삿푸 곶의 비석


 노삿푸 곶을 건너면 10km를 지나지 않아 ‘하보마이 군도’가 나타납니다. 맑은 날에는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땅이죠. 하지만 하보마이 군도부터는 일본이 아닌 러시아의 영토입니다.


 이곳이 바로 ‘쿠릴 열도’입니다. 하보마이 군도를 시작으로 슘수 섬까지, 일본 홋카이도와 러시아 캄차카 반도 사이에 들어선 수십 개의 섬이죠. 그리고 이곳이 러일 영토분쟁의 중심이 되는 현장입니다.


 쿠릴 열도에 러시아와 일본 중 누가 먼저 정착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양국의 주장이 엇갈립니다. 하지만 쿠릴 열도 남부는 일본이, 북부는 러시아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죠. 러시아가 일본과 접촉한 초기부터 쿠릴 열도를 둘러싼 산발적인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러일 양국이 처음 협상한 것은 1855년입니다. 일본이 러시아와 화친 조약을 맺으면서 영토 문제를 함께 정리한 것이죠. 사할린은 양국이 공동 관할하기로 하고, 쿠릴 열도는 둘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쿠릴 열도 남부의 4개 섬은 일본령으로, 나머지 북부 쿠릴 열도는 전부 러시아가 가져가기로 합의했죠.


 하지만 일본에게 사할린을 러시아와 공동 관리하는 것은 부담이 따랐습니다. 당시 에도 막부에는 사할린 같은 큰 섬을, 그것도 러시아와 경쟁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이죠.


 결국 막부는 1875년, 사할린 섬을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사할린을 러시아의 땅으로 넘기는 대신, 러시아가 갖고 있던 쿠릴 열도 북부까지 가져오기로 합의한 것이죠. 그렇게 사할린은 러시아 영토가 되었고, 쿠릴 열도는 남부뿐 아니라 북부까지 전부 일본 영토가 되었습니다.


쿠릴 열도의 국경선 변화


 하지만 양국 관계가 그리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죠. 1905년 러일전쟁이 벌어졌고, 일본은 승리했습니다. 그 대가로 사할린 남부를 가져오게 됐죠. 이제 남사할린도, 쿠릴 열도 전부도 일본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런 채로 40년이 흘렀습니다. 일본 제국은 2차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여했고, 패망했습니다. 패전의 틈을 타 러시아는 남진했습니다.


 러시아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가져간 남사할린뿐 아니라, 쿠릴 열도도 가져갔습니다. 일본이 한 번도 빼앗긴 적 없는, 쿠릴 열도 남부 4개 섬까지 차지했죠.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다음과 같이 합의했습니다.


“일본은 쿠릴 열도와,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해 획득한 사할린의 일부에 대해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다.”


희망의 종


 하지만 전후 시간이 지나며 일본의 입장은 선회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합의한 ’쿠릴 열도‘에 남부 4개 섬은 들어가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죠.


 남부 4개 섬은 홋카이도의 부속 도서이고, 그러니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의 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이 4개 섬을 쿠릴 열도에 속하지 않는 일본의 ‘북방 영토’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입장도 역시 강경합니다. 러시아는 러일 간에 과거에 체결된 조약은 이미 러일전쟁과 2차대전을 통해 파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효력이 있는 합의는 오직 전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뿐이라는 것이죠.


 물론 러시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적힌 ‘쿠릴 열도’는 북부는 물론 남부 4개 섬까지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협상 체결 당시의 일본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주장하고요.


일본 최동단 기념비


 일본의 최동단, 노삿푸 곶은 그런 두 주장이 맞붙는 현장이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모두, 자신들이 먼저 이 땅을 발견하고 차지했으니 쿠릴 열도가 자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영토 분쟁에서, ’고유 영토‘라는 것은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근대의 영토 관념이란 근대와는 너무도 다릅니다. 지금처럼 선으로 그어진 뚜렷한 국경선은 없었으니까요. 경계의 영역은 언제나 존재했고, 전쟁이나 정책적 이주에 따라 국경이 바뀌는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현대의 영토 분쟁에 ’고유 영토‘를 운운하는 것은, 지금 서울이 고구려의 것인지 백제의 것인지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주장입니다. 게다가 양국 모두 쿠릴 열도에 발을 들인지 겨우 150년 남짓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겠죠. 하지만 이제 쿠릴 열도에서는 그 의견을 물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두 나라보다 훨씬 일찍 쿠릴 열도에 거주하고 있던 아이누인은 이제 쿠릴 열도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일본과 러시아를 가리지 않고, 영토 분쟁 과정에서 아이누인은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양국은 아이누를 자신들과 동화시키고자 했죠. 문화를 강요했고, 자국인들을 쿠릴 열도에 정책적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아이누모시리(아이누인의 땅)‘는 파괴되었고, 이제 쿠릴 열도에 아이누의 정체성은 사라졌습니다.


 노삿푸 곶에는 과거 쿠릴 열도에 살다가, 러시아의 남진으로 쫓겨난 일본인들을 위해 ’망향의 집‘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고향과 조상을 그립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고향은 물론 정체성 모두를 부정당해야 했던 이들의 후손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노삿푸 곶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어느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존재하는 것은, 현대의 모든 영토 분쟁이 그렇듯 외교적인 판단 뿐입니다.


 설령 쿠릴 열도가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 영토’였다고 한들,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한 이상 쿠릴 열도는 러시아의 땅이 되는 것이 합리적이죠.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국제관계의 논리입니다.


 분명한 것은 지난 세기 일본이 침략전쟁을 통해 주변국과 갈등을 빚었고, 끝내 패전했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 피해는 조선과 중국, 타이완을 비롯한 외국뿐 아니라, 아이누와 같은 소수민족이나 일본 내의 일부 민간인까지도 포괄하는 것이었죠.


 그 과거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서 새롭게 건국된 나라가 지금의 일본국입니다. 1919년 건국되어 1948년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이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이듯이, 1947년 건국되어 1952년 국권을 회복한 일본국은 그 이전의 일본 제국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입니다.


 그리고 한 세기의 과오를 청산하고 새로운 나라로 태어나는 대가로 지불한 것이 겨우 네 개의 섬이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싼 값을 치른 것이 아닐까. 노삿푸 곶 앞의 거친 바다를 보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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