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다닐 때의 기억입니다. 수업을 하다 교수님은 “한국의 수도는 서울인가?” 물었습니다. 학생들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교수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무슨 근거로?”
이 질문에 다른 학생이 조금의 농담을 더해 답한 것이 기억납니다.
“이름이 서울이니까?”
서울이라는 말 자체가 수도를 뜻하는 우리말에서 온 것이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말 그대로 수도를 뜻하는 ‘교토(京都)'를 일본의 수도라고 할 수도 있을까요?
물론 일본의 수도는 도쿄입니다. 교토가 일본의 수도라는 것 역시 농담이 섞인 말이죠. 하지만 그런 농담이 만들어진다는 것 자체가, 교토와 주변 지역의 특수한 지위를 보여주는 일일 지도요.
교토에서는 도쿄보다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라와 오사카, 고베를 오가며 간사이에서만 한 주를 보냈습니다.
모두 역사의 흔적이 남은 도시들입니다. 어떤 흔적은 이제 비석과 들판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어떤 흔적은 천 년의 세월을 뚫고 여전히 그곳에 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벌어진 뒤, 덴노(天皇)는 교토 황궁을 떠나 도쿄로 향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정부 기능도 모두 도쿄로 이동했죠. 하지만 끝까지 도쿄로 수도를 옮긴다는 조서는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차이가 있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간사이 지방을 흔히 ‘긴키(近畿)’라고 부릅니다. 수도 근처의 지방이라는 뜻이죠.
그럴 만한 이유도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서울은 물론 역사 내내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서울이 중앙정부가 위치한 수도의 기능을 한 것은 600여 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일본의 경우는 다릅니다. 덴노가 교토에 체류한 것만 해도 1,000년 이상의 역사가 있으니까요. 동쪽에 무인 정권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덴노는 유신 정권이 세워지기 전까지 교토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교토뿐 아니라 간사이 전체로 시야를 넓혀 보면 역사는 더 깊어집니다. 사실 정확한 시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죠.
역사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국가는 야마타이국입니다. 기원후 3세기 즈음에 출현한 이 나라는 일본 열도의 다양한 지방 정권을 차례로 통합하며 성장해 나갔습니다.
이 야마타이국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규슈에 있었다는 주장과 간사이에 있었다는 주장이 맞붙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보든 간사이에는 강력한 정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것은 그 다음 시대로도 이어집니다.
이후 일본은 야마토 정권이라는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만들게 됩니다. 야마토 정권과 야마타이국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 시기부터는 정권의 중심지가 분명히 간사이 지역으로 옮겨 옵니다.
몇 차례 궁궐이 바뀌었지만, 593년부터는 현재의 나라현 다카우치군 자리의 아스카쿄가 궁궐이 됩니다. 이 시대를 ‘아스카 시대’라고 부르죠. 710년에는 나라에 헤이조쿄(平城京)를 지어 수도를 옮겼습니다. 이 시대는 ‘나라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다시 794년에 옮겨간 수도가 지금의 교토였습니다. 당시에는 교토를 ‘헤이안쿄(平安京)'라고 불렀고, 그래서 이 시대를 ’헤이안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길게 잡으면 기원후 3세기부터 일본의 중심지는 간사이였습니다. 특히 1천 년 동안 덴노가 머물렀던 교토는 그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깊죠.
물론 덴노가 언제나 정치의 중심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헤이안쿄로 수도를 옮겨오고 100년이 되지 않아 정권은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섭정에게 넘어갔습니다. 덴노는 현실 정치에서 힘을 잃었죠.
후지와라 가문이 쇠락하자 한동안 전직 덴노, 즉 상황이 정치를 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무사들이 정권을 잡았고, 그들은 동쪽 가마쿠라에 막부를 만들어 정권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무사들의 시대에도 교토의 덴노와 귀족은 여전히 강력했습니다. 덴노가 현실 정치에서 아예 배제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막후에서 힘을 발휘하던 덴노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세 일본에는 무사가 다스리는 막부와, 귀족과 덴노를 중심으로 한 황실이 사실상 두 개의 다른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혹은 반대로 덴노든 막부든 힘이 센 권문에 불과하고, 통일된 국가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죠. ”일본의 수도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은 어찌 생각하면 이 시기부터 던져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일본 정치에서 교토는 끝내 무시할 수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심지어 가마쿠라 막부를 만든 미나모토 가문은 3대 만에 가문이 단절됩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수장(将軍・쇼군)은 귀족인 후지와라 가문이 맡았고, 그 뒤에는 아예 덴노의 아들이나 손자가 맡습니다.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사라진 뒤 세워진 무로마치 막부는 그 중심지가 교토였습니다. ‘무로마치(室町)‘는 교토에 있는 거리 이름입니다.
그나마 교토가 정치적 중심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1467년부터 벌어진 ‘오닌의 난’ 때부터입니다. 내전으로 교토가 불탔고, 이후 100여 년 동안은 지방의 무사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전국 시대가 이어지니까요. 하지만 그 시대에도 여전히 교토의 상징적 의미는 컸습니다.
에도 막부가 들어선 뒤 도쿄는 명실상부한 수도의 역할을 했습니다. 쇼군의 힘은 강력했고, 과거보다 중앙집권적인 정책이 펼쳐졌죠. 에도의 경제력도 막대했습니다.
그러나 에도 시대에도 덴노와 귀족은 중요했습니다. 막부는 이들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죠. 하지만 결국 막부 말기에는 덴노의 목소리가 커져 갑니다.
그래서 에도 막부 말기 정치의 중심은 도쿄보다는 오히려 교토였습니다. 쇼군이 정권을 덴노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도, 메이지 신정부의 수립도 모두 교토에서 이루어졌죠.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는 교토에서 즉위했고, 정권을 포기할 때까지 한 번도 도쿄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긴키’ 지방은 큰 도시권입니다. 오사카도, 교토도, 고베도, 나라도 모두 손에 꼽히는 대도시입니다.
나라의 헤이조쿄는 사라지고 넓은 갈대밭이 되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가 있던 곳에는 비석 하나만이 남았습니다. 아스카쿄는 작은 마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이라는 도다이지는 여전히 그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청동 불상은 해가 진 뒤에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교토와 오사카의 도심에는 화려하게 빛나는 타워가 올라섰습니다.
이곳의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쪽과는 다른, 서쪽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수도는 어디냐는 농담 섞인 질문 속에도, 그 역사의 파편이 섞여 있는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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