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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담마 Dec 24. 2023

동지 팥죽과 시간의 원

몸이 먹는 음식과 영혼이 먹는 음식

명리학과 고구마


나는 고구마와 팥을 좋아한다. 음식을 즐기기 위해 먹는 사람이 아닌, 살기 위해 먹는 사람임에도 이 두 가지 식재료만큼은 참 좋아한다.


고구마는 삶아 먹는다. 계절을 막론하고 어느 때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평생 고구마만 먹고살아야 하는 환경에 처한다 해도 크게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반백 년을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고구마를 먹었겠는가. 그럼에도 이 현상에 대해 의문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해답이 여기 있는데 말이다. 존재의 본질은 자기 코앞에 단순한 모습으로 놓여있기 마련이다. 진리를 찾아 먼 우주를 헤맬 필요 없었다.


지난해부터 혼자 명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명리학은 사주팔자를 다루는 학문이다. 사주(四柱)는 말 그대로 네 개의 기둥을 뜻한다.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각각 하나의 기둥으로 삼는다. 년주, 월주, 일주, 시주. 기둥은 2층 구조를 이룬다. '천간'이라는 위층(연간, 월간, 일간, 시간)과 '지지'라는 아래층(년지, 월지, 일지, 시지)이 그것이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10 글자가 천간에 속한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12 글자가 지지에 속한다. 이 글자들은 우주의 신비를 품은 상징어다. 글자들은 각각 음양오행으로 나뉘어 저마다 특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천간의 '무'를 보자. 음양으로 볼 때 무(戊)는 양의 기운이며, 오행으로 볼 땐 토(土)의 기운이다. 따라서 무토(戊土)이자 양토(陽土)이다.


이런 글자 8개가 모여 한 사람의 운명을 드러낸다. 이것이 사주팔자다. 농경과 계급사회였던 과거엔 년주를 중요시했다. 현대에 이르러 일주, 특히 일간(日干)을 중심으로 사주팔자를 본다. 일간에 배속된 글자가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본다. 내 일간은 무토(戊土)다. 戊는 큰 땅이다. 큰 산, 너른 들판, 사막처럼 규모가 거대한 땅이다. 이에 대비되는 개념이 '기(己)'다. 기토(己土)는 인간이 소출을 얻어내는 농토, 택지 같은 작은 음토(陰土)다.


사람의 사주는 신강과 신약으로 나눠볼 수 있다. 거칠게 설명해 일간 주위의 글자들이 일간의 기운을 보강해 주면 신강한 사주다. 반대로 주위의 글자들이 일간의 기운을 뺀다면 신약한 사주다. 내 경우는 다소 신약한 사주다. 나의 근간인 '무토'에 힘이 되어줄 기운이 사주 자체에 약하다.


음식에도 음양오행이 있다. 고구마는 토의 기운을 머금은 작물이다. 괴근식물의 대표적인 예가 고구마 아닌가. 괴근은 덩이뿌리의 다른 이름이다. 뿌리가 영영소를 저장해 비대해지면 괴근이 된다. 땅속에서 비대해진 뿌리! 얼핏 생각해 봐도 토의 기운을 북돋아 줄 것 같지 않은가. 무의식적으로 고구마에 끌린 이유가 여기 있었다. 같은 무토(戊土) 일간이라도 신강한 사람에겐 고구마가 맞지 않다. 과유불급이라고 과하면 병패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이 나처럼 고구마를 즐긴다면 토가 왕할 때 드러나는 습성이 강화될 뿐이다. 내 경우엔 몸이 스스로 '신약'함을 알고 고구마를 먹어온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눈물이 찔끔 날뻔했다. 나의 영혼은 몸을 사랑하지 못하고 밖으로만 떠돌았다. 방치된 몸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 조용히 고구마를 먹어온 거였다.


팥죽, 내 영혼이 먹어온 음식


우주(宇宙)는 시간과 공간의 총체다. 우리의 존재 또한 시간과 공간에 걸쳐 있다. 몸은 공간을 점유하고 정신은 시간을 부유한다.


고구마는 내 몸이 먹어온 음식이었다. 신약한 몸이 스스로를 보하기 위해 찾아온 식재료였다. 그렇다면 팥은?

고구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몰랐듯, 팥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몰랐다. 이제야 깨우치게 된 사실을 여기에 기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팥은 시간을 부유하는 내 영혼이 먹어온 식재료였다.


팥은 동지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동지는 22번째 절기다. 북반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 동지다. 나는 이맘때 태어났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하고많은 날들 중 왜 이때 태어났을까? 봄가을처럼 좋은 계절을 생일로 둔 사람이 부러웠다. 동지 즈음에 태어났기에 성격이  '칙칙한' 거라고 여겼다. 동지가 극한의 음(陰)이기 때문이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라, 극한의 음에서 양이 태어난다. 음이 포화 상태에 이르러 양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시기가 이때다.


동양의 시간은 '원'이다. 하루는 낮이란 반원과 밤이란 반원이 겹쳐 동그라미를 완성한다. 어제에서 굴러온 시간은 내일로 굴러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개의 피자 조각이 모여 피자 한 판을 완성한 것이 일 년이다.


서양의 시간 개념은 '직선'이다. 서기 2023년. 2024년 2025년... 시간은 끝없이 미래로만 뻗어간다. 생각만 해도 피로하지 않은가? 과연 어느 쪽이 우주의 진실에 부합하는가?


우주는 프렉탈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큰 것 안에 작은 것이 들어있고, 작은 것 안에 큰 것이 들어있다. 브로콜리 한 송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라. 브로콜리 안에 작은 브로콜리들이 무수히 들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원자의 구조와 태양계의 구조가 똑같다. 양자의 바깥 테두리를 도는 전자. 태양의 바깥 테두리를 도는 지구. 돌고 도는 운동에서 시간이 탄생한다. 이때 돌고 도는 주체가 무얼까? 음과 양, 아닐까? 음이란 반원과 양이란 반원이 겹쳐 일 년이란 동그라미를 완성한다. 바로 이 만남의 접점에 동지가 있다.


선조들은 동지에 팥죽을 끓여 먹었다. 죽의 조리법은 단순하다. 굽고 찌고 조리고 삭히는 등 온갖 요리법을 동원한 음식과 다르다. 죽 한 그릇을 놓고 보면 경건한 마음이 든다. 단순함에서 오는 경건함이다.  

 

팥을 삶고 갈아 찹쌀가루와 쌀을 넣고 끓인다. 새알도 만들어 넣는다. 한 솥 끓여 그릇에 옮겨 담는다.


올해 처음으로 할머니 시늉을 내보았다. 할머니는 동짓날 팥죽을 끓여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뿌렸다. 그렇게 하면 액운을 물리칠 수 있다. 올 한 해 너무나 힘든 일이 많았다. 아파트라 팥죽을 뿌리지는 못하고 현관 바닥에 반 숟갈 떠놓았다. 부엌 싱크대에도 반 숟갈 떠놓았다. 방들과 거실은 고민하다 화분 흙에다 조금씩 팥죽을 뿌렸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올 때쯤 팥죽은 단단히 굳어버렸다. 현관을 들어서는 남편에게 바닥의 팥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순돌이 똥 아니야."


남들은 미신이라고 놀리 든 말든 이런 의식을 통해 내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년엔 어떤 액운도 우리 집 현관문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동생네에도 팥죽을 주었다. 남동생에게 전화해 102동 앞으로 오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이 동지야?" 남동생네가 식탁에 앉아 팥죽을 먹는 상상을 했다. 이제 그들도 붉은 갑옷을 입은 셈이다. 내년엔 어떤 액운도 그들의 몸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팥죽을 통해 내가 태어난 절기를 돌아보게 된다. 시간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흘러간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동지 이튿날 공기 중에 어제보다 양의 기운이 한 숟갈 많아짐을 느낀다. 이렇게 하루하루 우주는 양의 기운을 향해 나아간다. 극한의 양에 이르면 그날부터 음의 기운이 한 숟갈 더해질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돌고 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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