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속으로 12 화
브런치 덕분에 시청하게 된 '낭만 닥터 김사부'가 종영되었습니다. 3년 전에 방영했던 1부를 보지 못해 드라마의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특히 그동안 방영되었던 의학드라마와는 다르게 마취통증의학과 의사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어떤 고뇌가 있는지 보여주는 부분이 많아 드라마 작가에게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기업의 회장 막내아들이 췌장암으로 수술을 받다가 WPW 증후군으로 인해 수술 중 부정맥 발생이 일어나 결국 수술 중에 사망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WPW syndrome, 볼프-파킨슨-화이트(Wolf-Parkinson-White) 증후군이란 심장 내 전기 전달 회로에서 비정상적인 전도로인 Kent 섬유가 존재하여 전기 전달 과정이 비정상적으로 전달되기에 심전도상 델타 곡선이 보이면서 진단되는 질환입니다.
이 증후군이 있는 경우 평소에는 이 섬유로 전기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증상이 없다가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 섬유로 전기 전달이 이루어지면 심방세동, 심방 빈맥 등의 다양하고 위급한 부정맥이 발생하게 됩니다.
저도 이런 증후군들 가진 환자들을 지금까지 약 5 명 이상 마취를 해본 것 같습니다. 그분들 중 고주파 전류나 냉각을 이용한 비정상 회로 절제술(radiofrequency ablation 혹은 cryoablation)과 같은 치료를 미리 받아온 환자분들은 불행히도 없었습니다.
이 증후군의 경우 평소에 증상이 없이 살아오신 분들이 대부분이고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이런 질환이 있는 지조차 모르고 살아오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분들이 암수술을 앞두고 자신의 숨어있는 병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증상이 없었던 질환을 먼저 치료하고 암수술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제가 맡은 케이스에서는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WPW 증후군이 있는 환자에서 증상이 있었던 환자의 경우에는 수술 전 회로 절제술을 신중하게 고려하게 되지만 증상이 없었던 환자인 경우에는 많은 경우 마취 중 부정맥이 발생할 위험도를 감수하고 마취를 시행하게 됩니다. 물론 부정맥 발생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발생 시 시행해야 할 치료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요. 그러니,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WPW 증후군이 있는 환자가 수술을 앞두었을 때 마취과 의사가 마취를 거부하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장 안전하게는 수술 전 절제술을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수술이 응급수술인 경우나 준응급수술인 암수술의 경우 지체하기가 어렵지요.
몇 년 전에도 이 WPW 증후군을 가진 환자의 마취를 하게 되면서 수술 실안에 제세동기(defibrillator)를 미리 대기시켜놓고 환자의 몸에 제세동기와 연결된 심전도 전극까지 붙이고 수술과 마취를 시행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그 환자분의 경우 별문제 없이 모든 시술이 잘 종료되었습니다.
드문 증례이기에 전공의의 마취 증례에 대한 콘퍼런스에 주제로 올리고 담당 전공의에게 발표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전공의가 발표를 하는 도중 한 선생님께서 제세동기를 대기시켜 놓은 부분에 대해 딴지를 거셨습니다. WPW 증후군이라고 이렇게 제세동기까지 미리 가져다 놓고 요란을 떤 이유가 무엇이냐는 둥,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때 가져다가 사용하면 될 일이지... 하시면서 그 부분에 대해 계속 물고 늘어지시는데 그 당시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연장자이신 분이라 크게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이 드라마를 좀 보셨기를, 그리고 자신이 몇 년 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라봅니다.
수술을 앞둔 환자분들 중 평소에는 단순한 고혈압밖에는 없었던 분들도 수술이나 마취 직전, 혹은 수술 중, 종료 후에 갑작스러운 부정맥이 발생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환자분이 단순히 불안하고 걱정만 하는 경우인데도 그분의 심장은 그 긴장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혹은 마취와 수술과 같은 시술이 심장의 전기 전달에 변화를 일으켜 때로는 위험한 부정맥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런 부정맥이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경우도 있고 계속 지속이 되어 항부정맥 약제를 쓰거나 급기야는 제세동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취과 의사는 모니터를 보고 있지 않는 순간에도 모니터의 심전도 소리를 가장 신경 씁니다. 저의 일할 때 생긴 오래된 버릇 중 하나가 규칙적으로 환자의 심장 소리가 들려올 때 그 소리에 맞추어 춤추듯 몸을 조금씩 흔들며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규칙적으로 들리던 소리가 갑자기 달라지면 저희 마취과 의사의 심장 박동도 빨리 뛰고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함께 모니터를 째려보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희 아이들이 제 눈초리가 매우 무섭다고 합니다. 워낙은 그렇지 않았는데 수많은 위험한 상황을 눈앞에서 보아온 탓일까요? 모니터를 수십 년간 째려보아서일까요?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잡히고 미간에는 세로로 깊은 주름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지난주 금요일도 그렇게 모니터를 계속 째려볼 수밖에 없는 하루였습니다. 제가 맡은 수술방 2방 중 한 방은 유방암 수술을 받으시는 80이 다 되신 어르신이셨는데 3개월 전에 뇌졸중이 발생하여서 수술 전후에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나머지 한 방의 환자분은 심방조동(atrial flutter)이라는 부정맥이 있으신 70대 어르신이셨고요. 두 분 다 비교적 마취 위험도가 있는 분이셨기에 저는 수술이 종료될 때까지 두 방을 계속 돌아다니면 모니터를 째려보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두 분 다 별문제 없이 수술과 마취과 잘 종료되어 두 어르신을 중환자실로 모셔다 드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마취과 의사는 환자분들에게 정말 고마움을 느낍니다. 잘 버텨주셔서...
어려운 마취 케이스가 지나가서 안도의 한숨으로 오후 일과를 보내고 있었는데 다른 마취과 선생님이 맡고 있는 정형외과 수술방에서 난리가 난 것 같았습니다. 예정되어있는 수술이 원래 출혈이 비교적 심하게 나는 한쪽 골반 절제술(hemipelvectomy)였는데 아마도 출혈을 수혈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수술방에 가서 보니 모니터의 혈압이 50대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혈압이 너무 낮아져 수술을 중단하고 일단은 출혈 부위를 누르고 급속 수혈로 혈압을 상승시키려고 하는데 미리 잡아놓은 정맥로들 중 하나가 막혀서인지 수혈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출혈은 계속되고 위급한 상황인지라 일단 잡아놓은 정맥로와 약제로 혈압을 상승시켰습니다. 어느 정도 혈압이 상승되었으나 담당 마취과 선생님은 약제 투여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 제가 급하게 환자의 새로운 정맥로를 확보하였습니다.
환자가 측와위로 누워있어 정맥로를 찾기가 쉽진 않았지만 고맙게도 환자분의 목에 굵은 정맥이 눈에 띄어 간신히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환자분의 출혈을 수혈이 따라가면서 어느 정도 환자의 혈압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마취과 의사들은 이럴 때 정말 손이 떨릴 정도로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저 또한 정맥로를 확보한 이후에도 계속 손이 떨려 한동안 손을 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마취과 의사들 뿐이 아닙니다. 집도의 역시 이 수술에는 경험이 많지 않아 선배 정형외과 선생님과 함께 수술을 해나가고 있었는데 종양이 떨어지기 전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출혈에 많이 놀란 눈치였습니다. 나중에 수술이 마무리되어갈 때 본인이 너무 놀라고 긴장되어 정신이 없었다고 고백하더군요.
의사들이 마취나 수술 도중에 본인들도 두려움에 떠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리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환자분들이나 보호자분들이 아시면 좋아하시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그러합니다. 다행히도 그런 순간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현실 속의 의사들은 자신의 의료시술 중에 걱정, 두려움, 불안을 안은채 업무에 종사합니다. 의사들은 신이나 영웅이 아니며 환자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평범한 인간들입니다. '낭만 닥터 김사부' 같은 의사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니 드라마 주인공이겠지요? 김사부뿐 아니라 그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 대부분이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니 드라마 주인공들인가 봅니다.
요즘 우리들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핸드폰을 통해 어제 총 몇 명의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늘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실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지역적(endemic) 발생을 넘어서 전국적(pandemic)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제 직장 근처의 대학 병원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병원 응급실과 외래를 최소한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제 직장 또한 선별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입원하는 환자들 모두를 일괄적으로 폐흉부 촬영을 하고 열이 나는 환자들은 모두 코로나 검사를 시행하는 것으로 병원 내에서 확진자가 나오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확진자가 되는 순간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만인의 눈총을 받게 될 것이 뻔하니 바이러스 자체보다도 확진자로 낙인찍히는 것 자체를 우리들은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의 72%를 차지하는 대구의 상황은 어떨까요?
대구의 확진자들이 날로 늘고 있고 의료진들의 손이 턱 없이 부족하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대구와 인근의 의료진들이 자진해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는 뉴스 또한 보았는데 정말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그분들에게 힘을 실어 들이지 못함에 송구한 마음이 들면서 더 이상 대구에서 확진자가 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방법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죄송하기만 합니다.
대구에 사시는 분들은 이 상황이 얼마나 공포스러우실까요? 정말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재난 사태가 바로 이런 순간일 것입니다. 바이러스로 한 도시가 통제되어 버리는 영화에나 나올법한 상황이 바로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저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 인물에 푹 빠져 버리는 성향이 있습니다. 어제도 식사 중에 아이와 금요일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더니 아이가 그러더군요. 제 자신이 김사부로 착각하는 것 같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런 능력이 저에게 없으니까요.
요즘 같은 시기에는 어떠한 일도 손에 잡히질 않네요. 불안과 공포가 가슴 밑바닥에 깔려 무엇을 할 의욕도 상실됩니다. 그래서 다시 브런치에 끄적여 봅니다. 다른 분들도 많이 그러실 것 같아요.
연일 늘어나는 코로나 확진자들의 숫자를 보면서 공포에 사로잡힌 많은 분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루크 필즈의 '의사'라는 명화입니다. 아픈 아이 곁을 밤새도록 지키고 있는 의사의 지친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아마 대구 및 전국의 병원 의료진들 중에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의료진들의 모습이 이러실 것 같습니다. 모두 김사부만큼 유능하지는 못하겠지만 환자들을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김사부 못지않은 분들입니다.
그러니 너무 두려워 맙시다. 다만 조심하고 조심하시길.... 그래서 이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고 지나가길 기원합니다.
제목: The doctor (의사, 루크 필즈 작품, 1891, 테이트 미술관 소장, 런던)
헨리 테이트 경이 화가 루크 필즈의 어두운 사실주의 그림에 매료되어 그림을 부탁하면서 루크 필즈는 고민 끝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둘째 아이를 성심성의를 다해 돌보아 주던 의사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창문의 새벽빛이 어렴풋이 비치고 밝혀져 있는 등불은 왕진온 의사가 밤을 지새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루크 필즈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에게 여러 자세로 포즈를 취하게하는 등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많은 습작을 했다고 한다. 그의 노력만큼 이 명화는 후세에 많은 사랑을 받아 병원이나 다양한 장소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 출처: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