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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해향취 Jul 02. 2024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평범해서 기적 같은 나날들 ep.14


서로가 서로에게 히어로가 되어주었던 유월의 끝자락. 여름의 보석 같은 우리 둘째 이름은 단아다.

- 그거 산후도우미 오시면 거실에 두려고 했는데..

- 아냐 안방에 달아서 애들 자는 거 종종 확인하고 깨는 이유도 좀 파악하고 그러려면 여기다 지금쯤 달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차피 우리 작은 방으로 옮기면 어쨌든간 여기다 달아야 해.

- 뭐 그래라. 여하튼 희한한 똥고집이 있다니까..


한 달 전 남편이 내 생각과 다른 위치에 때 이른 홈캠을 달았다. 평소답지 않게 남편은 나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방 한 구석에 흡사 스타워즈 bb-8 같은 홈캠을 붙였다. 그리고선 시시때때로 아이가 잠든 모습을 확인하며 자다 우는 이유를 분석한다거나 찰나의 순간에 넘어지던 때를 되돌려보았다. 아이 침대 밑에 이불 대신 메모리폼 매트를 깔게 된 것도 홈캠 덕분이다.


좌우지간 홈캠 설치를 시작으로 아기 빨래, 침대 세팅, 출산 가방 싸기 등 본격적인 출산 준비에 돌입했다. 예정일에 맞춰 부모님이 올라오실 테니 자연 분만을 가정했을 때 나흘이면 첫째를 돌보는 문제도 해결.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자두가 40주 하고도 3일 반나절을 넘기기 전까지 말이다. 어엿한 어른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니 우리 가족이 연약한 햇병아리처럼 느껴졌다. 엄마아빠 역시 나흘간 부족함 없이 삼대(三代)를 알뜰살뜰 잘 거둬먹였으나, 정작 딸의 출산이라는 중요한 시험은 치르지 못했다며 울고 웃다 무겁게 발걸음을 돌렸고 야속하게도 자두는 오롯이 우리 가족만 남은 그날 자정 무렵에 신호를 보내왔다.


밤 열한 시, 우리는 미리 싸두었던 짐을 바리바리 챙기고선 잠든 아이를 깨워 병원으로 향했다. 분만실에 들어서자 [보호자 1인만 들어오실 수 있으며, 아이는 출입을 제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지옥문을 지키는 케르베로스를 마주하면 이런 느낌일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편과 새까만 눈동자를 동글동글 굴리고 있는 첫째를 뒤로 하고 일단 혼자 분만실에 입장했다. 첫째 때도 그러했지만 분만이 이뤄지기까지 모든 과정은 팔다리가 묶인 듯 무력하고 불편하고 무척 빠르게 진행된다. 누가 눕힌 건지 내가 누운 건지 자각할 틈도 없이 언제부턴가 산소마스크를 낀 채 팔과 배에는 여러 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곧 진통이 온다는 신호이다. 이내 문이 드르륵 열리고 목소리가 무진장 큰 조산사가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첫째는 못들어와요잉. 어디다 맡기든지 해요잉. 우리가 여유가 있으면 아빠가 탯줄 자를 때 잠깐 첫째를 봐줄 수 있는데 그것도 장담 못해요잉. 지금 응급 산모들이 엄청 많아요잉. 빨리 아빠한테 전해요잉.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왜울어요잉? 엉? 뭐 때문에? 여기저기서 들리는 산모 비명 소리와 깍깍대는 아기 울음소리, 고함에 가까운 조산사의 목소리가 뒤섞인 틈을 타 나는 더 크게 울었다. 애초에 우는 이유를 들어줄 여유조차 없던 조산사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십 분이나 지났을까 남편이 들어왔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있었다. 우리는 서로 보자마자 갓 태어난 아기 울음소리보다 조금 작게 울었다. 남편은 서울 이모님 댁에 첫째를 데려다주고 온다며 두 시간이면 왔다 갔다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병실 밖에서 첫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이 떠나고 수액이 똑똑똑 떨어질 때마다 울다가 자꾸만 눈물이 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 곁에 도와줄 가족이 없어서 서러운 것인지, 남편이 없어서 무서운 것인지,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질 첫째가 걱정되어서인지, 아니면 첫째를 출산의 걸림돌처럼 대해서인지, 청개구리처럼 부모님이 떠나자마자 신호를 주는 둘째가 야속해서인지, 혼자 아기를 낳거나 그러다 응급 수술이라도 하게 될까 두려워서인지, 목소리가 무진장 큰 조산사 때문인지. 전부였다.


그렇다고 이런저런 감정에 휩쓸려 무력하게 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선 둘째를 무사히 건강하게 낳아야 하고 남편과 첫째는 안전해야 했다. 이 두 가지만 보장된다면 사실 다른 건 별 문제도 아니었다. 그제야 나 혼자서도 아기를 낳을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남편도 나와 마음이 통했는지 서울에 가지 않고 아이를 집에서 재우는 중이라고 했다. 어차피 집까지 십 분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고, 한번 깊게 잠들면 아침까지 잘 자니까 홈캠으로 계속 체크하면 될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니 푹 재운 뒤에 금방 가겠다고 했다. 부모님이 있는 동안에 나와주기를 바랐건만 이제는 첫째가 깨기 전까지만, 그러니까 동트기 전까지만 나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기는 자기가 세상 밖에 나오고 싶을 때 태어난단다. 그게 가장 좋은 때야.


언제는 둘째가 첫째보다 조금 빨리 나온다더니. 어른들의 출산 가설은 기가 막히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침 여섯 시가 되도록 자두는 여전히 나올 준비만 하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홈캠이 소리를 감지했다며 신호를 보냈다. 첫째가 점점 뒤척이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아이가 놀라지 않게 옆에서 머무르다 일찍 등원을 시킬 작정으로 다시 집으로 향했다. 여덟 시쯤 새로운 조산사가 들어와 한두 시간 안에 아기가 나올 것 같다며 보호자를 찾았다. 첫째를 등원시키고 올 예정이라고 대답하니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응원을 보탰다. 아가야, 아빠 올 때까지 조금만 참아보자.




고군분투하는 우리를 봐서라도 한 번쯤은 그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던 건지 자두는 6월 26일 오전 9시 31분, 남편이 병원에 부랴부랴 도착한 후에 나와주었다. 아기에게도 우리에게도 가장 좋은 때였다.


지금 나는 조리원 창가에 앉아 그날을 떠올리며 촘촘하게 엮어진 시간으로 수없이 돌아가본다. 비장하게 홈캠을 달던 남편을 지나 강릉으로 떠나는 날까지 김밥을 말던 엄마의 옆모습, 손녀 하원길에 목마를 태우고선 만개했던 아빠의 오랜 미소, 홈캠 속 흑백 화면 너머로 곤히 잠든 첫째, 아침을 알리며 우렁차게 울어대는 둘째가 보인다. 그리고 누구 하나 놓치지 않으려 정신없이 그 시간을 오가던 남편의 땀방울이 스친다.


서로가 서로에게 히어로가 되어주었던 유월의 끝자락. 여름의 보석 같은 우리 둘째 이름은 단아다.


2024.07.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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