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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진 Dec 17. 2019

마음 작명소 : 위선

'착함' 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



최근 내 일상을 가장 강하게 규정지은 고민은 이거다. 올바르게 살고 싶다는 것. 조금 강박적으로 나를 옭아매서 정신이 괴롭긴 하지만 그렇게 살고싶다, 내 선호가 그리로 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이건 착하게 사는 것과는 또 조금 다르다. 지역으로는 영남, 성적지향으로 이성애자, 학력으로 SKY, 가정 내에서 맏이, 경제적으로 중산층, 신체적으로 비장애인, 그리고 이 땅에서 사는 한국인으로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계에 예의를 지키는 것.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이게 <정치적 올바름>인 거 같다. 그래서 한동안 도널드 트럼프 당선 배경 등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염증을 꼽는 분석을 볼 때마다 가벼운 좌절에 시달렸다. 아니 그래서 뭐 어쩌자는거지. 미국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아직 그렇게 적극적으로 강박적으로 집요하게 최선을 다해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보지 못한 사회 아닌가. 그런데 벌써 수명이 다하다니. 우리는 좀 더 올발라야 할 필요가 있는 거 아닌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뭐 그런 상실감이 들었다.



위선이랬다. 굉장히 오랜만에 이 단어를 접하자 옛날옛날 기억이 새록 떠올랐다. 그날 엄마는 “위악떠는거니까 이해해주자”라고 했다. 위악과 위선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위악을 ‘떨다’라는 표현이 어쩐지 좋았다. 악다구니에 받쳐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같은 걸 떠올렸다. 나는 그럼 위선이랑 위악 중에 뭐가 더 나쁘냐고 물었다. 그날 우리는 위선이 더 나쁘다고 결론 내렸다. 그건 거짓말이니까. 착하지도 않은데 착한 척, 가증스러우니까. 사실 그때 나는 나에게 면죄부를 좀 주고 싶었다. 당시 내가 하던 나쁜 말과 나쁜 생각을 위악이라 여기고 싶었다. 내가 진짜 나쁜 건 아니고 나쁜 척 하는거야. 사실 착한데 이건 위악떠는거야, 라는 말로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밤 문득, 그건 위악이 아니라 그냥 <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상대방은 상처받았으니까 내 진심과 상관없이 그건 나쁜거야. 위악에 <악>이 있으면 위선에 <선>이 없다고 말할 수 있나. 위선은 적어도 <선>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다. 알면 나중에 할 수 있다. 지금 진심이 아니면 좀 어때. 어차피 인간은 <선>의 화신도 아닌데. 속으로 뭐라 생각하든 말이나 행동만이라도 <선>을 흉내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해서 위악이나 떨며 스스로를 동정하는 사람보다 냉랭한 위선자가 되는 게 더 훌륭하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언젠가 A랑 이야기했다. 우리는 사실 안 착한데, 어렸을 때 <바른생활>을 너무 열심히 배워서 착한 게 뭔지 안다고. 뭔지 아니까 그렇게 해야할 거 같고 안하면 찝찝하다고. 나는 아직도 내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안 착한데 착하고 싶어하고, 올바르지 않은데 올바르고 싶어한다. 그 과정에서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한다. 강박이라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진심이 아닐 땐 아마 티도 날 거다. 물론 뭐가 선이고 뭐가 올바른 것인지 또렷한 확신은 없다. 그래도 아직은, 여전히 위선과 가짜 올바름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다만 하나 바란다면 나의 가짜안에 깃든 아주 쬐끄만 진짜 착함과 올바름이 매일매일 조금씩 더 커지는 것. ‘좋은 사람’에 가까워지는 것. 그리하여 언젠가 그게 진짜 내가 된다면, 나는 무척 기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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