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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제대로 14화

자녀들에게 나는 어떤 말로 기억될까?

by 망초

대학 졸업, 결혼, 취직, 두 아이의 출산, 내 집 마련이 모두 198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지금의 청년들이 보기에 좀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그 시대였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집의 특수 사정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도 인생의 종착점이 멀찍이 있고, 그 사이에 어떠한 우여곡절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무난한 인생 항로였다고 생각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과 내가 맞닥뜨린 파도는 물론 동일한 것이었다. 내가 거센 파도를 남들보다 좀 수월하게 넘을 수 있게 한 힘은 일상에서 들은 몇 마디의 ‘말’과 ‘행동’이었다.


어린 시동생들이 줄줄이 있는 집의 맏며느리로 한때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던 나의 큰 형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우리 부부에게 건넨 말씀, “밥 하기 싫다고 사 먹기 시작하면 돈 안 모인다.”

아이 둘 기르면서 직장 생활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일요일에는 박카* 먹어가면서 밀린 일하는 생활을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계속했지만, 큰 형님의 가르침을 90퍼센트 이상 지켜 왔다.


유복자로 태어나 굶주림 속에서도 지역의 국립대 졸업하고 말단 공무원 생활을 하시던 외삼촌. (내가 대학교 들어갈 때는 입학금 전액보다 더 큰돈을 주셨다.) 당신의 자녀도 4남매나 되지만 우리 형제들이 오면 데리고 앉아서 공부를 가르치셨다. 한자도 배웠던 것 같고,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초등학생이던 나에게 子丑寅卯로 시작하는 12지를 손가락 위치까지 짚어가며 가르쳐 주셨다. 외삼촌의 사랑과 반복 학습 덕분에 나는 또래보다 그 부분은 더 빨리, 더 확실히 잘 알 수 있었고, 이후 다른 학업에도 선한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우리 엄마,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생활비를 벌어야 자녀들과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자녀들이 일어나기 전에 집안일은 모두 끝내야 하셨다. 내가 수험생 시절에는 맛있는 반찬을 전혀 해 놓지 않고 다른 일을 하시는 엄마를 원망한 적도 많았다.

‘덥다고 가만히 있으면 더 덥다.’ 말이 안 되는 말 같지만, 여름 낮 더위에도 이 일 저 일하면서 어머니의 이 말이 정말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라는 것은 힘들기도 하지만 크고 작은 성취감이 더위를 잊게 한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가 곧 일이었으니 더위를 핑계로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신을 전적으로 돌보는 자녀를 못 알아보는 치매 상태로 우리 가족 모두 상심에 빠뜨려 놓으시고도, 베란다에 나가서 화초 돌보시는 어머니시다.


나는 어떤 말과 어떤 모습으로 내 자녀들에게 기억될까?


(사진-둘째 딸이 지은 우리 집 소재의 그림책 표지, 교보문고에서 가져옴.)

2025.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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