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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호랭이 Mar 31. 2024

[서평]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 고통

손봉호 『고통받는 인간 - 고통 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



고통이 아무리 분명한 대답을 거부하는 신비요, 그에 대해서 이제까지의 철학이 아무리 무력했다 하더라도 철학은 그것과 더불어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없고 고통이 끼치는 영향에서 벗어난 인간형성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고통의 문제를 무시하면 인간현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무시하는 것이요, 고통의 경험을 전제로 하지 않은 인간 이해는 인간의 참 모습을 반영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0p



죽음과 고통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지만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개개인마다의 정도와 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만인에게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야말로 철저한 무화로써 인간을 엄습하지만 고통은 다르다. 고통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인간에게 찾아오며, 심지어 죽음처럼 단 한 번이 아니라 수도 없이 찾아온다. 그런 큰 차이가 있음에도, 죽음과 마찬가지로 고통은 인간이 피할 수 없다는 절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철학적 고찰과 성찰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있어 고통은 아직도 미지의 세계다. 태어나서부터 죽는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얘기하는 불교와, 원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을 받는 거라고 하는 기독교처럼 고통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도대체 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주 옛날에 번개를 과학적으로 소명할 수 없었던 당시 그것은 신의 노여움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왜 태어나는지, 왜 숨을 쉬어야만 살아갈 수 있게 설계됐는지와 같이 인간이 왜 고통받는지에 대한 질문은 존재의 근간에 다가가기 위한 질문과 같다.



고통은 물리적 아픔과 정서적 괴로움의 결합체이다. 현대 사회에 들어 물리적 아픔에 대한 고통은 마취 등과 같은 방법으로 회피할 수 있는 획기적 방법들이 많이 고안되고 도입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굉장한 속도로 그 수준을 높여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사회불평등의 논리에 따라 소외 계층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정서적 괴로움은 물리적 아픔의 회피 기술에 역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내가 봤을 땐 사회 고통의 총량은 절대 줄어들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소외계층에도 물리적 아픔을 회피할 수 있게 해주는 범윤리적 차원의 논의를 제외하고서 철저히 내 개인적 입장에서는 정서적 괴로움으로 인한 고통에 대한 회피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난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이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고통이란 개인적 판단 없이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것인데, 그 부정적 무엇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그것으로 인한 고통의 영향을 얼마나 줄일 수 있냐가 바로 정서적 괴로움을 회피하는 데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니체의 권력 의지와 영원회귀를 통해 모든 것을 나의 전진 동력으로 삼는 것처럼 고통을 내 삶의 재료로 사용하는 방법들이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



결국 고통의 데미지에 얼마나 무덤덤할 수 있냐 혹은 그것을 얼마나 에너지로 치환할 수 있냐가 고통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주어진 더 나은 삶을 위한 하나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



고통을 없앨 순 없다. 만약 이 세상에 고통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세상은 없을 것이다. 고통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과 같은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올 수 있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고통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이지만, 야속하게도 고통의 존재 자체는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더 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그 답을 철학에서 찾아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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