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전 세계의 무게를 자기의 두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다.
실존주의에 빠져 패기롭게 도전한 『존재와 무』. 이 책만 읽었던 건 아니지만, 읽는 데만 5개월이 걸렸다. 내가 생각하는 내 삶의 태도와 방향, 그 철학과 윤리가 실존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은 책 속에서 실존주의를 접할 때마다 느껴지던 가슴의 떨림이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실존주의를 탐닉하기 시작했고, 가까운 친구들은 이미 날 실존주의자라 부른다.
실존주의에서 빠질 수 없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격언은 항상 무언가 명쾌하지 않았다. 그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 내 앎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명확해졌다. 그 유명한 격언 앞에 '인간에게 있어'라는 말만 붙이면 된다. 그렇다. '인간에게 있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에게 본질 같은 것은 없다. 애초에 이유 없이, 우리의 의도 없이 세계에 내던져진 우리 인간에게 있어 본질이 있을 리가 없다. 인간은 그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 전제 아래에서 사르트르의 모든 철학은 시작된다. 존재는 그렇다 치고, 무(無)는 무엇일까? 사르트르는 인간을 무화 하는 존재로 정의하기도 하는데, 이는 쉽게 말해서 부정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끝없이 부정하면서 미래로 나아간다. 그렇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나간다. 예를 들어, 내가 부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은, 지금의 부자가 아닌 가난한 모습에의 부정에서 촉발된다. 존재는 그렇게 스스로의 무화를 통해 지금을 끝없이 초월한다.
무는 결코 소멸이 아니다. 무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초월하는 존재의 능동적인 과정이다. 그 끊임없는 무화를 능동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닌지는 당신의 자유에 의한 선택이다.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당신이 실존주의자로 살아가느냐 아니냐를 결정짓게 될 것이고, 실존주의자로서 당신에게 펼쳐질 삶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생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모두 한 존재의 선택이고, 그 결과 역시 그 선택에 따른 것이며, 온전히 자유로운 그 존재의 책임이다. 이렇게 실존주의는 삶을 미래로 이끈다. 지금 처해진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떠안으며 자유를 온몸으로 만끽하는 것. 실존주의자는 절대로 나 이외의 탓을 하지 않는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 모든 결괏값은 내가 만든 선택으로 인한 것이다.
즉자존재, 대자존재 등 어려운 사르트르만의 철학 용어가 난무하지만, 결국 내용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크게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이며, 자유에 의한 선택, 선택에 따른 결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비운의 존재인 것이다.
내 앞에 펼쳐지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내 자유와 선택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인간을 '전 세계의 무게를 자기 위에 짊어지고 있는 존재'로 부르기도 한다. 인간에게 있어 전 세계는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단위의 세계랑 같다. 내가 떠올릴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내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와 당신은 지금 어깨 위에 '각자'의 세계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당신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보다는 매섭게 이성적인 말로 다그칠 것이다. 당신이 처참하게 불운한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말들은 당신에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 현재의 부정을 통해 스스로의 미래를 개척해나가라는 희망적인 의미를 품고 있음이 분명하다. 각자가 처한 엄동설한 같은 현실을 직접 겪어보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무례한 말들일 수 있지만, 실존주의자라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신의 미래는 선고된 자유에 의해 당신의 선택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도 끝없는 무화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당신이 당신을 인식하는 순간, 그 순간의 당신은 무화되고 사라지고 만다. 인간은 끝없는 사라짐, 즉 무화의 연속되는 삶을 살며 마침내 죽는 것이다. 죽어도 그 존재는 다른 대타존재에 의해 인간 실재로서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인간의 무화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순간, 죽음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그다지 두려운 무엇이 아니게 된다. 그냥 당연한 삶의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게 죽어 형체가 없어진다고 해도, 그 절대적인 죽음은 내 존재의 있었음을 무화 시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잊힐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죽은 후의 내 존재는 인간 실제로 누군가에게 존재하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