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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과 반항의 차이 -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by 책 읽는 호랭이

극복과 반항의 의미에 대해서 깊게 생각에 잠겼다. 명쾌하게 그 두 단어의 차이를 결정짓는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아, 아마도 나는 두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존주의를 추종하는 나의 삶의 태도 앞에서, 극복과 반항은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측면에서 무게감을 갖는 개념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명확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둘의 결정적 차이에 대해 침잠해보기로 했다.


각 단어의 사전적 정의부터 찾아보자. 극복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악조건이나 고생 따위를 이겨 냄.' 반항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 맞서 대들거나 반대함.'


사전적 정의로 봐서도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려는 주체성이 돋보인다. 극복은 이겨내는 것이고 반항은 반대하는 것이다. 이 간추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결정적 차이는 바로 '대상의 넘어섬' 여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극복은 극복의 대상을 마침내 넘어서는 것이고, 반항은 반항의 대상의 존재를 전제하기만 할 뿐이지 넘어서진 않는다.


극복과 반항이 완전 반대되어 모순된 의미를 띠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극복과 반항을 동시에 적절히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실존주의적 측면에서는 꽤 깊게 다뤄볼 만한 문젯거리다.


왜냐하면 우리 실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 중 한 명인 알베르 카뮈의 슬로건이 반항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카뮈의 반항이 갖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재조명해보는 것이다. 카뮈의 철학을 가장 깊게 느낄 수 있는 '시지프 신화'속 산 위로 무한히 돌덩이를 올려야만 하는 시지프의 이야기에서, 시지프가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부조리 그 자체이다. 카뮈가 그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다면, 돌덩이를 없애버리거나, 탈출할 어떤 방법을 강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뮈는 그 부조리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 반항하는 것을 택한다. 왜냐하면, 부조리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돌덩이를 옮기는 것은 항존하는 세계의 부조리를 나타내는 상징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카뮈는 부조리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즉 극복할 수 없기에 반항해야만 하는 삶의 태도를 택한 것이다.


죽음과 부조리 같이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에게 극복은 불가능한 것일지 모르겠다. 아니,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기에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그것들을 무리게 극복하려 안간힘을 쓰는 순간 비합리적인 신념이나 종교에 자기를 의탁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매 순간이 부조리인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는 카뮈의 반항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주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극복과 반항을 내부와 외부로 각각 의미짓는 것이 어떨까 싶다. 현재의 나는 끝없이 무화된 상태로 다음 순간의 내가 되는데, 이는 분명히 극복과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순간의 나는 그 전 순간의 나를 이겨낸 상태일 거니까. 외부 세계의 영향은 결코 내가 소멸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찬 세계일 터이니, 나에게 그것들은 반항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적으로는 끝없는 극복을, 외적으로는 반항을 하며 나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빛과 어둠을 껴안으며 살아가는 것이 실존주의자의 마땅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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