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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dden pleasures Nov 22. 2022

Life with God 5

박영선 목사님 [욥기 강해 26강]을 듣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인간의 상식에서 바라본 나는 큰 아들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갔고, 둘째가 얄미웠으며, 아버지가 그런 방식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공의롭게 느껴지지 않고 나에게도 그럴 것 같아서 불안했다.


이런 식으로 이해가 시원스럽게 되지 않는 성경의 내용들은 비일비재했는데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랬고,

주인이 종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먼길을 다녀 온 비유가 그랬으며,

아브라함에게 제물로 이삭을 바치게 시험하신 것이 그랬고,

얍복강가에서 야곱과 씨름 하신 것이 그랬고,

요나에게 그늘 박넝쿨을 만들어주셨다가 거두신 것도 그랬다.  

비일비재 정도가 아니라 거의 모든 내용들은 모순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일반적인 원인과 결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고 무슨 소리인지 황당하기까지 하기도 했다.

애써 억지로 이해하려했던 작업들은 마치 욥의 친구들주장 같이 논리적으로 맞으나 공허했다.


왜 한번도 인간의 논리구조로 말씀을 보는 것 자체가 한계인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돌이켜보면 말씀에서는 상식선의 원인과 결과를 말하는 것이 드물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로서 탕자를 애닮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그러나 억울함에 사무치는 그 형의 입장을 왜 그렇게 길게 묘사하셨을까… 형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은 것일까?


욥기에서 하나님은 원인과 결과, 인과응보, 권선징악을 기대하는 인간세계에

원인없는 창조, 씨앗없는 탄생, 엄청난 신비함 속의 세계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자연스러운 것만같은 인간의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창조의 세계 아래있으며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그 아래 엎드려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강해에서 탕자인 둘째아들이 집을 떠나고자 했을때 아버지는 그의 선택을 허용했으며, 그것은 더 큰 자비로의 부르심을 위한 열린 선택을 허용하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무한한 자유 속에 열어놓으신 무대로의 초대를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세계이며 그 세계는 틀 속이 아니라고 해석하셨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말씀은 일상의 기도 ‘말씀대로 살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매일 마침표를 찍으며 우리의 삶을 기도속에 묻어 놓고 걸어나와 조금도 변화가 없는 삶을 살아감에 대해 언급하신 것이었다.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의 삶에 대한 태도와 하나님에 대한 평면적이며 인간적인 해석은 성경의 읽는 나의 태도, 그리스도인이 어때야한다는 일차원적인 나의 생각, 도식적인 기도로 나의 삶을 가두는 습관을 보는 것 같았다.


욥은 그런 친구들의 허무한 이야기들을 뒤로하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묻기 시작했고 울부짖었다. 창조주 절대자 하나님은 피조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오셔서 창조세계에 대해 긴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욥은 그 이야기를 알아들었으며 그 신묘막측한 창조세계를 창조하신 측량할 수 없이 크신 분이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신을 아들로 삼으셨으며 친히 오셔서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심을 알고 감격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욥기는 욥의 인내함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해석하고 싶었을 뿐..

내가 희망하는 것처럼 욥이 끝까지 지고지순하게 하나님 앞에서 순하고 착하게 견디어서 주님이 애닮게 보시고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전보다 더한 복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투병상황을 생각하면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뛰어넘는 믿음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기가 두려워 욥의 인내와 복주심에 초점을 맞추어 단순화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욥의 친구들의 이야기. 욥의 울부짖음. 하나님의 등장. 그리고 결말은 다층적인 구조로 이해가 어려웠다. 지금도 어렵다.


그런 욥기를 풀어주시는 강해가 있어서 감사했고, 강해를 들으면서 인간의 관점이 아닌, 창조자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볼때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이해로 조금 더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했다.

초등학교 6학년때 교실에서 흐린 날의 창밖을 바라보며 ‘인간은 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해소되지 않은 답답함을 가졌던 것이 생각났다. 그 이후에도 그런 질문에 답해 줄 어른은 주변에 없었다. 초등부 전도사님은 엉뚱하게도 내 질문을 막아버리고 회심기도로 마무리하고 바쁘게 나를 돌려보냈었다.


지금 욥기 강해를 들으며 그 질문에 대한 원했던 간결하고 명확한 답이 아니지만, 믿음직하고 확고한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가 우리에게 열려있음을 그리고 그 문쪽을 향해 걸어갈 길을 내어주셨음을 알게되는 것 같아 설레인다.

어쩌면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를 위해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비유로 들어주신 라이언일병구하기 이야기가 나에게 많은 부분 해방감을 주었는데, 노인이 된 라이언이 절체절명의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우리도 그와 같이 이미 이기신 싸움의 결과를 얻고 과거를 거슬러 간 라이언 일병처럼 이 세상을 살며 훈련의 과정을 거쳐 성장하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탕자의 형인 것 같이 느껴질때마다,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다처럼 느껴질때마다, 한달란트를 맡은자로 느껴질때마다, 불합리한 명령을 받은 요나처럼 뾰루퉁하게 느껴질때마다….. 나의 실제 삶의 가치를 돌이켜볼수 있는 눈이 뜨이는 비유여서 감사했다.


오늘의 여기의 나는

나의 가족(자녀들과 남편)과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어떤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실제의 훈련을 날마다 해 나갈 것인가…

(야곱의 일생을 아버지는 어떻게 보실까 생각하며 위로를 받는다)


욥기를 다시 읽으면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 같았는데 다시 읽은 지금 여전히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어렵다. 그러나 거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깊이 들어와 있는 말씀을 읽고 따라가며 질문하고 생각하기를 거듭하여 주님 주시는 은혜로 주님 원하시는 바대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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