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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dden pleasures Dec 01. 2022

Life with God 6

대장부처럼 허리에 띠를 동여매고

박영선 목사님 욥기 34강 마지막 강해를 듣고

욥기 38장 1-3절 [그때 여호화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식한 말로 나의 뜻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허리띠를 동여매고 대장부처럼 일어나서 묻는 말에 대답해라”]


엘리후의 독설(?) 후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4장에 걸쳐 욥에게 꾸짖듯이 질문을 하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이를 꾸짖듯이 라고 받아들였는데 그 현장은 과연 어떠했을까.. (당돌한 어린 엘리후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는 것은 의미심장하며 기대가 되는 부분이다. 그를 분명히 다루시고 성장케 하셨을 것이다)


다시 읽어보는 오늘도 꾸짖으신다는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의 대상이 되어 당대에 가장 의로웠다는 욥이 고난을 받는 중에 하나님이 오셨다면, 애매히 고난을 받는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따뜻함을 예상했던 나의 생각과는 다른 그림이었다.

햇살과 포근함 속에서 자애로움을 가지고 등장하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폭풍우 가운데서  등장하신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장부 처럼 일어나 대답하라고 하신다.


이 구절은 잘 못알아듣고 내멋대로 해석하려는 나에게 다시 알려주시려는 것처럼 40장 6-7절에 반복된다. [ 그때 여호화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여매고, 묻는 말에 대답하여라”]


내가 간과했던 지점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욥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욥기 1장 1절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흠 없고 정직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미워했습니다.]

그렇지… 그는 성숙함은 이미 나의 이 어린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사람이었다. 욥을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성숙의 수준이 어린 내가 아니라)그가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만난 욥은 대답했다.

욥기 42절 2-5절 [“‘무식한 말로 내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셨지요? 저는 정말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였고, 깨닫지 못하는 일들을 아는 체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묻겠으니 너는 대답하여라’고 하셨지요? 주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 저는 주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욥은 하나님 아버지의 친히 오심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보았으며, 얼마나 감격했을까…

사방이 막히고 답이 없는 것 같은, 앞이 보이지 않는 고난과 또 다시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나타나주신 아버지. 그 크신 사랑을 만남..

욥기의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 옳은 말을 하던 세친구는 무대에서 사라졌고 흥미롭게 시작되었던 내기의 마무리도 시원스레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언급되지 않았다.


영화의 제작 의도가 완전히 바뀐 것처럼 이전의 스토리는 아무렇지 않게 팽개쳐지고, 이제 욥기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마치 처음 연애를 하는 연인처럼 욥만을 바라보고 계신 것 같았다. 그를 성숙케 하시기 위해 자상하게 함께하심이 느껴졌다. 대장부처럼 나오라고 하신 그 마음은 어떤 것일까… 욥을 피조물중 하나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로 부르시고, 그런 욥은 대장부처럼 나올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니 울컥했다.


우리가 이땅에서의 살아감이 성숙과 훈련이라는 점을 말씀하시는 박영선 목사님은 강해에서 아브라함과 이삭, 예수님의 고난을 통과하심 그리고 욥의 성숙을 함께 말씀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창조하시고 적당하게 그저 그렇게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끝까지 부르시며,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함께 하시고 성숙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애매히 받는 고난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욥은 그 고통을 통과하며 그의 울부짖음, 호소에 하나님 아버지께 옳다함을 들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질문과 이해가 없는 회개로 소통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물으면서 걸음을 걸어가는 것을 옳다고 하신 것이 아닐까?


욥은 아버지 앞에서 고난을 통과하며 겸손하여 지고, 억울한자가 바른말과, 논리와, 옳음과, 원인과 결과를 주장하는 세 친구를 사랑으로 감싸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포용의 성숙함에 이르게 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극치의 사랑,

그 증거를 몸소 그 몸에 새겨넣으심,

그 길을 걷도록 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표현할 길 없는 억울한 죽음의 길을 걸으시면서 포용과 무한의 사랑을 피조물의 세계에 내려와 보여주심의 모범을 따라 성숙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따라 걸어가야 할 길임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마침표를 찍고 ‘행복하게 살았어요’ 방향으로 자꾸 가고 싶어하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에 고난은 끝없이 계속되고 마침표는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쓰디쓴 고난의 과정을 겪음에도 우리의 삶이 안전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나만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글로 쓰기도 두려운… 맞닥뜨리기 싫은 고난… 그러나 어떤 고난이 있을 지라도 각자의 모양대로 그리고 주님을 닮아가는 결국 성숙에 이르게 하실 분이 절대자,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이다.


나의 육체의 고난과 함께, 나에게 있어 삶의 실제의 훈련의 장은 남편, 자녀와 함께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특별히 사춘기 초입의 큰 아이와 갈등을 겪을 때면 말씀보다, 훈련보다, 성숙보다 억울함과 내 입장과 바른 말과 옳은 논리의 내가 드러나게 된다.

내가 남편에게 당신의 억울함은 2순위로 하고 나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위로하고 격려해달라고 어린 수준으로 요청해 온 것처럼, 나의 큰 아들은 왜 엄마는 이래야 하냐는 나의 억울함을 뒤로 하고 자신을 사랑으로 감싸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나의 큰 아들과 나는 부딪힘이 있을 때마다 서로의 바름, 서로의 논리, 서로의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불꽃튀게 논쟁을 한다. 이제 겨우 13살 짜리 아들과 논쟁에서 지기 싫어하는 내가 가끔 말문이 막힐 때.. 권위로 누르고 싶은 생각이 들때…

의인도 아닌 내가,

허물로 버무려진 나의 의를 가지고 억울하다 생각하는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들을 통과하며,

나의 의는 날마다의 씨름에서 죽어지고,

나의 억울함은 겸손함으로 물들고,

사랑으로 나의 자녀와 다른 이들을 포용하고 감쌀 수 있는 성숙에 이를 수 있기를…

그 훈련을 날마다 해 나갈 수 있기를…


말뿐인 회개로 훈련과 성숙을 단절시키고, 진정한 회개가 실제 삶의 훈련을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외면하지 않기를…


진퇴양난의 자녀와의 갈등때문에,

내 육체의 고난때문에 더 깊이 고민할 수 있게 하시는 오묘한 진리의 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를 믿으며 살아가는가?

를 날마다 생각하고 현실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대장부처럼 허리에 띠를 띠고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든든하게 뒷배경으로 갖고 있는 자로서 담대히 나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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