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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Jul 24. 2023

파르페

나를 여기로 끌어당긴 달콤한 마법

일본에서 파르페는 빼놓을 수 없는 간식이다. 나만 해도, 친구와 일본여행을 갈 때 꼭 먹고 싶은 음식으로 파르페를 꼽았다. 한국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간식이자-물론 지금은 꽤 있지만 당시는 그랬다-온 세상의 귀여운 것들을 다 합쳐놓은 듯한 깜찍함! 파르페를 먹는 게 버킷리스트였을 정도니까. 그렇게 귀여운 간식은 무슨 맛이 날지 궁금했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에서 먹은 파르페는 너무 달고 달고 달았고 친구랑 갔던 최악의 식당이 되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은 파르페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인생은 알 수 없는 법. 어쩌다 보니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오게 됐다. 당시 교환학생을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나는 적응하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적응하지 못할 이유가 산더미처럼 많았는데, 일단 이 나라가 1 지망이 아니었고, 일본어를 그렇게 잘하지 못했고, 처음으로 셰어하우스에 살게 된 데다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같은 학교에서 온 애들밖에 없었고, 게다가 그것도 코로나로 인해서 일주일 늦게 오는 바람에 나만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첫날 사온 마트 도시락은 입에 맞지 않아서 엉엉 울어버렸다. 일본에 오기 전만 해도 먹고 싶은 게 많았는데 왜 오니까 라멘이고 텐동이고 다 꼴 보기가 싫은지.



원래 교환학생은 학기가 시작하기 전보다 2주~한 달 정도 일찍 도착해서 살림살이 정돈을 하고, 외국인+유학생으로서 해야 하는 각종 서류들을 처리하고 생활에 필요한 기타 여러 가지 절차들을 해야 하는데 상황이 좋지 못했다. 비자발급이 느려져서 출국도 개강 직전으로 미뤄졌는데 내가 갔을 때는 이미 개강 1주 차가 지난 후였다. 그래서 나를 도와줬어야 하는 시스터-학교에서 지정해 줬다-는 학교 수업으로 동행이 어렵다고 했고, 결국 난 일본어를 굉장히 잘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시청(구약소)에 방문할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걸어서 20분 정도에 떨어져 있는 구약소는 애들에게 굉장히 기피되는 존재였는데, 그걸 기꺼이 해주겠다는 친구에게-그때는 친하지도 않았다- 감동을 받아 밥을 사기로 했다. 우리가 절차를 다 끝마쳤을 때는 굉장히 애매한 시간이라 브레이크 타임인 곳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한 식당이 패밀리 레스토랑 조나단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정확하게 6개월 뒤 나의 근무처가 된다.




그날은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나를 도와준다는 정말 착한 그 친구는 알고 보니 나와 맞는 점이 많았고, 한국에 두고 온 내 오랜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외롭다는 생각이나 스트레스가 그 친구를 만나면서 사라졌던 것 같다. 한두 시간이 걸리는 대기도 같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방 가버렸으니까.


우리는 대문짝만 한 함박 스테이크가 그려진 현수막을 보고 가격을 꼼꼼하게 알아봤다. 스테이크나 함박 스테이크는 1000엔대의 굉장히 합리적인 가격을 자랑하고 있었고 우리는 주저 없이 들어갔다. 처음으로 일본에서 먹는 맛있는 밥이었다. 정신없이 밥을 먹고 나서 내 시선이 닿은 곳은 파르페였다. 엄청난 크기의 초코 파르페는 비주얼도 호화로운데 가격도 꽤 양심적이었다. 그때 먹은 파르페는 마지막에 있는 케이크가 지나치게 달긴 했지만-이건 지금도 너무 달다-굉장히 맛있었다.



브레이크 타임도 없고 음식도 맛있고 직원도 친절하고. 그때의 조나단은 나에게 긍정적으로 남아있었고 결국 그날의 기억은 내가 6개월 뒤 알바를 구할 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주로 나는 주말 반나절+풀의 조합으로 알바를 들어가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인력이 부족한 패밀리 레스토랑의 특성상 주말은 지옥과 다름없다. 맨 처음 내가 들어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가하다고 부를만한 날들이 없었다. 이유는 전혀 모르겠지만 요새는 손님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래서 한가한 오늘이 특이했다. 오늘은 웨이팅이 아예 없었으니까. 솔직히 감사할 따름이었다.


직원들은 근무가 있는 날 세전 330엔의 금액(최대 1200엔까지)으로 직원 식사를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하는 날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은 오늘 뭐 먹지? 다. 휴게가 있는 날은 휴게 시간에 먹고 휴게가 없는 단시간 알바 때는 미리 와서 먹거나 퇴근하고 먹어야 한다. 어떤 메뉴를 먹던 가격만 맞추면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장시간 근무하는 날은 비교적 든든하게 먹는 게 좋다. 언제 퇴근할지 모르니까...-이게 진짜 조나단의 공포다.-


나는 조나단의 파르페가 맛있었던 기억이 있어서 배가 별로 안 고프거나 짧게 근무할 때면 가끔 먹고는 했다. 너무 달아서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조나단에서는 시즌별로 디저트 메뉴가 바뀌는데 이번에는 무려 복숭아였다. 복숭아라는 과일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분홍색 과일이 올라간 덕에 이번 파르페는 온통 핑크빛이었다. 게다가 인기도 좋아서 디저트를 시키는 테이블은 꼭 그 녀석이 끼어있다. 그러니 당연히 먹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파르페는 주방이 아니라 홀에서 만들기 때문에! 선배들의 허락이 필요했다... 짬이 안 찬 외국인은 아직 만들 줄 모르기 때문에... 재료가 어딨는지 모를뿐더러 아무래도 레시피 안 글씨를 읽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내가 노려야 할 건 홀이 한가해서 선배한테 부탁하거나 또는 이것저것 물으면서 만들어도 욕먹지 않을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오늘은 모처럼 5시간밖에 안 하는 날이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가했기에. 사실 배가 고파서 손님들의 그릇에 담긴 함박 스테이크를 보고 배고프다는 생각을 서른 번 정도 하긴 했다. 하지만 주방에 직원 식사가 얼마나 걸릴지 물으니 꽤,라는 추상적이고 두려운 답변이 돌아왔다. 이미 쌓인 전표 5개, 텅 빈 주방.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오늘 나와 근무하는 도가와 상은 비교적 엄격한 편인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완전한 원칙주의자에 일본인은 잘 쓰지 않는 강한 명령형과 직설적인 말투-일단 제가 만난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단호한 태도에 처음에는 겁을 먹었지만 일하다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감사인사도 제대로 전하고 장난도 가끔 치고. 일하나는 제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난 그래서 도가와 상을 꽤 좋아한다. 같이 있으면 불편하지 않으니까.


하루종일 홀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서 퇴근을 하고 나서 슬쩍 물어봤다. 이미 퇴근을 했는데 파르페를 만들어도 되겠냐고. -원래 도가와 상도 나와 같이 퇴근을 해야 하지만 퇴근을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물어보면서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도가와 상은 당연히 된다면서 꽤 기뻐하며 이것저것 알려줬다.


내 기억을 조합하면 알로에, 라즈베리 소스, 휘핑크림, 복숭아젤리, 소프트 아이스크림, 시리얼, 라즈베리 소스, 복숭아 아이스크림, 휘핑크림, 복숭아 네 조각이 올라갔다. 아마도? 방금 만들었으니 맞을 것 같다.


재료를 차근차근 쌓으면서 도가와 상과 얘기를 나눴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알바를 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땐가, 아리마와 도가와 상과 셋이 근무했을 때. 아리마가 추천해 준 초코 파르페와 그라탱 세트를 주문하고 도가와 상과 함께 초코 파르페를 만들었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받다가 너무 많이 나와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다들 깔깔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짠 크림을 보고 대단하다고 박수 쳐주던 도가와 상. 조나단을 더 좋아하게 된 날이었다.


유해진 분위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말이 술술 나왔다. 잡담 같은 건 눈치 보여서 전혀 안 하는 편인데도. 의미 없는 소소한 대화들이 즐거웠다. 이거 아무리 봐도 잘못됐다, 크림이 못생겼다, 소스는 좀 더 유리컵 면에다가 뿌려라, 먹고 싶은 대로 팍팍 넣어라. 도가와 상은 매니저가 없는지 눈치를 보고 슬쩍 아이스크림을 한단 더 쌓아줬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기뻤다. 너무 많이 넣는 바람에 복숭아가 안 들어가서 애를 먹었다. 도가와 상은 또 주위를 쓱 보더니 복숭아 크림을 왕창 짜줬다. 괜찮냐고 했더니 뭐 괜찮지 않겠냐고 했다.



여태 먹고 싶었는데 요즘 너무 바빠서 말을 못 했다고 했더니 그럴 때는 부탁해도 되는지 물어보면 된다고 했다. 바쁘지 않으면 해 줄 거라고. 당연할 수 있는 말이 나한테는 감동적이었다.

도가와 상은 다음 달부터 내가 없을 거라고 하니 쓸쓸하다고 했다.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꽤 기뻤다. 일요일도 잘 부탁한다는 말에 나도 잘 부탁한다고 답했다.



최근에 도가와 상은 피로 때문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굉장히 예민해져 있었는데 오늘은 평소와 같은 도가와 상이라 기뻤다. 그리고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던 일이 하나 있었다. 오늘 엄마랑 온 애기 손님이 창문 자리에 앉고 싶다고 얘기를 했었다. 창문이 좋다고 우는 애기를 보고 전에 왔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다행히 창문 자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창문 자리가 없었다. 밖을 둘러보니 마침 창문 자리가 비어서 도가와 상이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그 손님에게 뛰어갔더니 창문 자리에 앉은 다른 분들과 얘기하고 있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곧 갈 테니 이 자리에 앉으라고 이야기했고 엄마는 그런 민폐는 끼칠 수 없다며 사양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이 기쁜 소식을 알렸고 분위기는 훈훈하게 마무리됐다.


그리고 도가와 상을 도와 자리를 마저 정리하면서 이 얘기를 짧게 전했다. 그러자 도가와 상은 알겠다면서, 그러면 이러는 게 낫겠다고 블라인드를 살짝 걷어서 창밖이 보이게 했다. 그 별 거 아닌 것 같은 행동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 사람은 정말 깊은 다정함을 가졌구나. 나는 창문 자리를 원하는 애기를 위해 뛰어다니면서도 빨리 안내할 생각밖에 못했는데. 창문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라 애기는 창밖이 보고 싶은 걸 텐데. 친절과 배려가 쌓여서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분홍빛의 달콤한 파르페는 이 하루의 완벽한 종지부를 찍었다. 잘 익은 복숭아는 달았고 복숭아 아이스크림은 새콤했다. 복숭아 크림도, 아이스크림도 너무 달지 않아서 좋았다. 라즈베리 크림은 새콤달콤한 덕분에 단맛을 중화시켜 줬고 바삭한 시리얼은 씹는 게 즐거웠다. 초코 파르페는 하나만 먹어도 너무 달았는데 이 파르페는 몇 개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너무 맛있다고 하니 도가와 상은 원래 일하고 먹으면 더 맛있는 법이라고 내가 기뻐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먹을수록 웃음이 나왔다. 분명 어떤 파르페를 먹어도 이것만큼 기분 좋진 않겠지. 아마 이곳이, 지금이 그리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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