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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Jul 10. 2023

라멘

이 밤이 흐려지지 않았으면

일본에서 로망이라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하고 싶었던 걸 꼽는다면 역시 부활동이다. 정확하게는 부원들과 즐겁게 부활동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간단하게 라멘이나 햄버거나 먹는 것. 이 단순해 보이는 로망에는 정말 많은 조건들이 숨어있는데 첫 번째, 부활동을 하고 있을 것, 두 번째, 부원들과 사이가 좋아야 할 것, 세 번째, 부원들이 나와 어울리고 싶어야 할 것, 네 번째, 모두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해야 할 것.



유학생이 되면 외국인 친구들도 잔뜩 생기고 매일 일본어만 할 줄 알았는데 그건 꿈같은 소리였다. 아무래도 한국인들끼리 몰려다니게 되고 외국인 친구는 사귀기 어렵고. 유학생 수업은 모조리 외국인들밖에 없었고 일반 수업은 이미 있는 수업에 내가 들어가는 것뿐이니 그 안에서 이미 교우 관계는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끼기가 힘들었다. 한국이라면 옆에 앉은 애한테 말이라도 걸어볼 텐데. 행여나 외국인을 싫어하면 어쩌지?라는 생각 때문에 용기도 없었고.



그렇게 겉돌기만 하던 나를 챙겨준 게 바로 테니스부였다. 일본의 학기는 4월부터 시작하는데 나는 애초에 10월, 그러니까 하반기 파견자였기 때문에 이미 반년이 지난 후였다. 그래서 일반 부원 모집을 하지 않았고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부원을 받아주는지 물어봐야만 했다. 솔직히 여기서도 환영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외국인이고, 오래 활동하지도 못하고.


10개 가까이 보낸 메일 중에서 제대로 답은 준 곳은 4곳. 테니스부, 합기도부, 관현악부, 크리켓부. 배구부와 농구부는 정말 들어가고 싶었는데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이 오지 않아서 포기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간 게 테니스부의 견학이었다. 당시 부장이었던 사치카 상이 답장을 빨리 보내는 편이었기 때문에. 부실이 모여있는 건물은 따로 있었는데, 사치카 상은 그때 코스모스에서 만나자고 했다. 내가 아는 코스모스는 코스모스홀인데. 그곳에서 기다렸지만 누가 봐도 모임 장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지나가던 교수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물었더니 자기가 어딘지 안다며 흔쾌히 데려다주시겠다고 했다. 나에게는 무척이나 따뜻했던 기억이다. 시간이 없는데 뛰어도 되겠냐며 같이 학교를 가로질러 뛰었다.



그렇게 테니스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테니스부 애들은 정말 친절했다. 잘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뱉으면서 내가 와줘서 너무 기쁘다고 했다. 애들과 다 같이 운동장을 달리고 테니스를 치고. 그 감각은 나에게 선명하게 남아서 나는 그날 바로 테니스부에 입부했다. 반년동안의 활동은 쉽지는 않았다. 우선 반년이 지난 상태라 1학년들끼리도 이미 친했고, 2, 3학년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명백한 깍두기였다.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


그래서 애들이 잘해주는데도 불구하고 영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면 난 앉아서 웃기만 해야 하는데. 재밌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애들과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졌다. 이것도 부활동이고 나름 일본 스러우니 괜찮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4월, 3학년들이 모두 은퇴해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덕분에 1, 2학년과 더 친해졌다. 새로 들어온 1학년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이것저것 제안을 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마치고 뭐 먹으러 가는 게 소원이었다고. 그 말에 애들도 그러고 싶었다고 이야기해 줬고 그게 무척 기뻤다. 내가 누군가한테 부담 주는 게 아니니까!



아무래도 모두 가기에는 인원수가 많으니까 부원들이 적당히 온 날에 가기로 했다. 다 같이 먹으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애들도 얼마나 들떴던지. 내 들뜸이 전염된 건지 모두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애들은 돌아가면서 나한테 메뉴를 물어봤는데 솔직히 난 뭐든 좋았다. 중요한 건 뭘 먹는 게 아니라 같이 먹는 거니까. 그렇게 목적지도 없이 호기롭게 길을 나섰고 돌아다니다가 애들의 눈에 띈 게 라멘집이었다.




원래 식당에 들어가면 오리지널 메뉴를 먹어야 한다는 게 나의 철학이지만 일본은 아무래도 음식이 짜고 달다 보니 내 안에 있는 한국인은 언제나 매운맛! 을 외쳤다. 이번에도 매운맛을 골랐고, 자리가 부족해서 넷과 둘로 찢어지게 되었는데 내가 둘 쪽이었다. 다른 애가 자기와 단둘이라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난 오히려 좋았다. 넷도 즐겁지만 둘이면 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라멘을 주문하고 나니 면의 퍼짐 정도와 국물의 농도를 결정할 수 있었는데 오래 생각하는 게 힘들어서 친구와 똑같이 달라고 했다. 이럴 때는 현지인을 믿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밤의 라멘집은 여럿이서 온 사람들보다 퇴근길에 뭘 먹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날은 시원했고, 옆 사람들은 모두 라멘을 먹는 거에 열중하고 있었다. 애들과 우르르 몰려와서 앉아있으니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멘이 등장했다. 커다란 그릇 가득 담겨있는 라멘! 일본에서 맛보기 힘든 얼큰한 국물이 나를 반겼다.


먼저 국물을 한 입 먹고, 면을 먹었다. 짠맛과 깊은 맛, 그리고 끝에 살짝 올라오는 매콤함이 절묘했다. 국물을 먹고 또 먹고. 원래 라면을 먹을 때는 국물을 잘 안 먹지만 라멘은 자꾸 국물을 먹게 됐다. 맛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친구도, 나도 신이 나서 열심히 라멘을 먹었다. 원래 먹으면서는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럴 겨를도 없었다. 아무래도 하루종일 수업을 듣고 6시부터 8시까지 부활동을 하면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맛있냐는 친구의 말에 여태 먹은 라멘 중 제일 맛있다고 했다. 친구는 너무 기쁘다고 웃었다. 난 일본어를 그렇게 잘하지도 않고 한국어처럼 돌려 말하는 법이나 재밌는 농담을 할 수도 없어서 일본어로 말할 때면 언제나 솔직해진다. 기쁘다, 싫다, 재미없다, 힘들다. 직관적인 단어밖에 떠올리지 못해 안타깝지만 그만큼 내 마음은 솔직하게 전해진다.


줄곧 부활동이 끝나고 이렇게 다 같이 뭘 먹으러 오는 게 꿈이었다고, 사실 친구 사귀기 힘들었는데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다고. 한국이라면 절대 못할 솔직한 마음들이 튀어나왔다. 친구는 자기야말로 고맙다고 했다. 처음부터 나와 친해지고 싶었다는 말에 나도 그랬다고, 답했다. 솔직함의 농도가 짙은 대화는 기껍기만 했다. 라멘에 취한 건지, 여름밤에 취한 건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집에 가는 길에는 모두가 배가 불러서 기분이 좋았고, 역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도 대화로 빈틈없이 채워졌다. 처음이 있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다. 그날은 날씨도 맑고 바람도 시원하고 달은 동그래서,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나한테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테이프가 있다면, 일본에서 그 하루만은 꼭 저장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행복했다.









애들의 다정함은 따뜻하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소개했을 때는 자기가 하는 한국어로 자기소개를 해줬고, 자기가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나 아이돌을 먼저 이야기해 준다. 내가 못 알아들을까 봐 천천히 이야기해 주고 설명해 달라고 하면 몇 번이나 다시 이야기해 준다. 당연한 배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 배려가 너무 따뜻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걸 굳이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사실 난 국적이 다르면 친구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그러지는 않았는데 이곳에서 유학을 하면서 매일같이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린 배우고 자란 게 다르고, 문화가, 역사가, 사고가,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국적으로서 가지는 기저에 깔린 생각도 다르다. 그건 불쑥불쑥 거슬리는 못처럼 날 당황스럽게 한다. 그리고 언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지점이 있고 만다.


돌아가는 길 편의점에서 다같이 사먹었던 것. 빙 둘러서서 마셨던 것, 먹는 내내 손이 시려워서 살려줘! 하고 외친 건 잊지 못할 거다.

그럼에도 나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싶지 않다. 몸으로는 몇 번이나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애들이 보여주는 마음에 머리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다른 만큼 같은 것들도 있다. 절대적인 지점에서 가까워지기 힘들지라도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한다면 줄어들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걸 알면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준 애들을 놔버리고 싶지 않다.



정말 많이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전해야지. 마음이,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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