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집에 갈 때면 식탁 위에 올라오는 단골음식들이 있다. 반찬가게에도 없고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그야말로 할머니만의 오리지널 음식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빨간 감자다. 빨간색과 갈색을 반반 섞은 것 같은 양념이 묻은 감자는 베어 물면 부드럽게 으깨진다.
빨간 두부도 빨간 감자도, 아빠가 어릴 적부터 먹고 자란 음식이기 때문에 아빠가 요청할 때면 우리 집 식탁에도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다만 난 먹지 않았다. 빨갛고 까만데 맵진 않은 이상한 음식이었으니까. 무슨 맛인지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맛이었고 어려운 맛을 사랑할 정도로 나이가 들진 않았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 입맛이 바뀐다고, 아빠가 하도 맛있게 먹고 자꾸 찾으니 어떤 맛인가 싶어 먹어봤다. 고등학생이 되고서야 다시 먹은 빨간 감자는 짭짤하고 매콤한 맛이 묘하게 돌아서 중독적인 맛이었다. 딱딱하지 않은 식감도 좋았고 겉에 양념이 잔뜩 발린 것도 좋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집에서 빨간 감자를 외치는 사람이 늘었다.
엄마는 할머니보다는 할머니요리를 못했다. 그런 걸 보면 손맛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했고. 빨간 감자에서 어려운 점은 감자를 다 익히는 거였다. 물론 감자를 완전히 익히고 나서 만들어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만드는 도중에 감자가 으깨져 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감자가 있었느냐 아니냐가 가장 큰 논쟁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먹어보고 만든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 들어가는 녀석들은 어딘가 설익어서 아삭, 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똑같은 레시피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와 엄마의 음식은 맛이 달랐다. 할머니는 특별할 게 없다고 했지만 분명 특별함은 숨겨져 있었다.
지금은 창원에서 서울을 넘어서, 일본-그것도 지금은 여행 중이라 오사카 변두리에 있다-에서 지내고 있는 중이지만 4년 전에는 창원을 뜨는 것도 큰일이었다. 마치 지구 반대편으로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1년 동안 재수생이라는 신분으로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은둔자 신세로 지냈더니 새로운 사람들과 수없이 부대껴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하게만 다가왔다. 창원을 뜨는 것도, 처음 보는 애들밖에 없는 곳으로 가는 것도, 모두 부담이었다.
어른들이 가장 걱정한 건 밥이었다. 얘가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을지 술만 먹는 건 아닌지 굶고 다니는 건 아닌지 온통 걱정이었다고 했다. 밥솥에 밥을 안치는 것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밥은 해 먹어야 한다-햇반보다는 고슬고슬한 밥이 좋았다-는 신조에 따라서 엄마가 준 밥솥도 이삿짐 안에 알차게 넣었다.
사실 내가 먹는 반찬들은 주로 오래가지 않는 것들이나 집에서 혼자 해 먹기 힘든 것들-생선구이-이 많아서 서울에 올라가면서 반찬을 딱 하나 챙겼는데 그게 바로 빨간 감자였다. 비교적 오래갔고 잘 상하지도 않고 질리지 않는. 까다로운 기준을 나름 충족한 반찬이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1학년 1학기 때가 아침을 잘 챙겨 먹던 시절이었는데 재수생 때의 부지런함이 남아있었는지 매일 8시 반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었다-제일 빠른 수업이 10시 반이었고 학교에서 5분 거리 자취방에 살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일주일인가, 10일인가 매일 아침마다 빨간 감자를 먹었다. 익숙하고 맛있는 게 먹고 싶었다. 익숙한 게 우선순위였다.
처음에는 맛있었고 편안했다. 하지만 뭐든 그렇듯 점차 지겨워졌다. 빨간 감자한테는 미안하지만 그게 나에게는 좋은 선택이었다. 다른 게 먹고 싶어 지니 요리에 대한 두려움은 작아지고 욕심이 생겼다. 덕분에 이런저런 요리에 시도할 수 있게 됐고 나름 잘 먹고 잘 살게 됐다.
모든 게 익숙하지 않던 시절에 유일하게 익숙했던 게 탁자 한자리를 채우던 빨간 감자였다. 아마 내가 질린 건 감자의 맛보다도 반복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낯선 땅에 나에게 위안을 주는 게 조그마한 락앤락에 담긴 감자들이라니. 분명 그 감자들이 없었다면 내 불안도 그리움도 더 오래갔겠지.
빨간 감자는 고춧가루와 간장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고 엄마가 알려줬다. 마침 일본에 있는 내 방에도 고춧가루와 간장이 있다. 이번 학기 도시락 반찬은 빨간 감자가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