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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사잡상가 Mar 27. 2020

[사설] 김상헌은 왜 최명길을 비난했을까?

사료비판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를 공부하면서 조선시대사를 바라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고대사보다 사료가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운 점도 있다. 최근에 드는 느낌이지만 사료가 많은 탓에 자신의 주장을 말하기가 약간 멈칫할 때 가 많다는 점이다. 고대사도 마찬가지지만 사료가 많은 조선사의 경우는 비전공자인 필자가 이야기하기에는 더더욱 말하기에 앞서서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최근에 병자호란에 대한 재평가가 계속되면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병자호란의 이미지가 척화파가 그려낸 이미지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강화도 방어전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김경징에 대한 이미지는 강화도에 있지 않았던 나만갑에 의해서 그려진 이미지이다. 또한 김자점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 또한 나만갑을 비롯한 척화파에 그려진 이미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종래 병자호란의 사료로 많이 이용되었던 개인들이 쓴 사료들 상당수가 척화파에 의해 저술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종래의 병자호란에 대한 연구가 사료비판이 부족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려가 되는 점도 있다. 척화파가 사료를 쓴 이유가 "주화파를 모함하기 위해서"라는 단순하고 성급한 논리로 가는 글들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인터넷을 보면 과감하게 이를 모함이라고 하는 글도 있고, 김자점의 병자호란의 행적에 대해서도 해당 사료의 기초적인 사항에 대해서 고려하지 못한 글도 있다. 개인적으로 조선시대를 전공하지 않지만 위험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척화파들이 쓴 사료와 다른 사료를 비교하면 차이가 있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척화파의 모함으로 보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왜 사실과 다르게 썼는지?", "저자의 상황이 어떠했는지?"와 같은 기초적인 사항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사도 마찬가지지만 사료가 많은 조선사의 경우는 더더욱 기초적인 사항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최근 김상헌이 남한기략에서 최명길을 악마화했다는 주장을 사료비판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겠다. 해당 글에는 병자호란 때 유명한 사건인 "김상헌이 국서를 찢고, 최명길이 그것을 이어 붙였다는" 이미지가 김상헌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성구를 지우고 최명길을 모함, 악마화를 통해 구성된 이미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병자호란을 기록한 여러 사료와 교차검증을 통하여 논증하였다.


사료를 쓰기 전에 이용하기 전에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이나,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사료비판을 한다. 사료비판은 크게 두 가지의 단계로 진행한다. 첫 번째는 해당 사료가 진서인지, 위서인지를 검증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해당 사료를 "왜 썼는가?", "작가는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먼저, 김상헌이 남한기략을 저술한 것이 사실인지 따져보자. 남한기략은 김상헌이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실제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김상헌이 남한기략을 지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남한기략에 대해서는 진위 논란도 없는 것으로 보아 김상헌이 저술한 저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김상헌은 최명길을 모함하기 위해서 이성구를 지우고, 자신이 국서를 찢고, 최명길이 붙였다는 이미지를 그렸을까?


이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의 사료비판을 해보겠다. 남한기략의 목차를 보면 강화도에서 일어났던 일이 있다. 또 내용상에는 12월 21일 이후의 기록에는 날짜가 없고, 심지어 전후 사정이 바뀌어 서술된 부분도 있다. 이를 보면 김상헌이 남한기략을 쓴 시기가 삼전도의 굴욕 이후에서도 상당한 시일이 지난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김상헌이 최명길을 모함했다고 쓴 문장도 다른 사료와 비교할 때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도 남한기략이 병자호란이 끝난 이후에 저술되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남한기략의 위와 같은 사료적 성격을 감안하면 김상헌이 이성구를 지운 이유도 "기억의 혼란" 때문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여기서는 김상헌이 기억의 혼란이었을 가능성과 힘께 기억을 하였을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것은 병자호란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1637년 2월부터 조정에서는 전란의 패전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남한기략을 제외하고 국서와 관련한 사건을 기록한 사료들에서 이성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성구는 이수광의 아들이고, 병자호란의 패전을 둘러싼 논쟁의 당사자였던 이민구의 형이다. 이 점은 김상헌이 왜 이성구를 제외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1637년 2월에서 시작된 병자호란의 패전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10월까지 이어졌다. 그 이유는 강화도 방어전과 관련한 김경징에 대한 처벌이 인조에 의해서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김경징은 영의정이었던 김류의 아들이었다. 척화를 주장한 사람들은 강화도 방어전과 관련해 김경징, 이민구, 장신은 물론 김류까지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구에게도 그 여파가 미쳤다. 실제로 승정원일기에는 3월에서 5월까지 이성구가 사직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확인된다. 사직을 요청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민구에 대한 논의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게다가 7월에는 이성구는 청에 인질로 잡힌 자기 아들을 1,500금이나 주어 청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의 속환 가격을 비싸게 만들어 논쟁을 유발했다.

(출처-조선왕조실록)


A. "좌의정 이성구는 국가가 황급할 때에 병조 판서 겸 부체찰사로서 마침내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되게 하였으니, 김류와 경중의 구분이 있기는 하나 혼자만 그 죄를 면할 수 없고, 또 아들을 속할 때 1천5백 금이나 주어 이때부터 속가가 매우 비싸져서 가난한 백성이 속하고 돌아올 희망을 아주 없어지게 하였으므로 중외에서 원망하고 욕하니, 이성구를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파직하였으니, 다시 번거로이 논하지 말라." 하였다." -인조실록, 인조 15년, 7월 7일


위 기록을 보면 이성구는 파직을 당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김류와 윤방까지 파직되었다. 이들의 파직된 이유가 전후 사정상 강화도 방어전과 관련한 것임을 보면 이성구도 마찬가지의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척화론자인 김상헌의 입장에서는 이성구는 병자호란에 대한 책임을 진 것과 같았다. 하지만 영의정까지 오른 최명길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심지어 최명길과 인조는 김상헌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비난도 하였다.

(출처-조선왕조실록)


B.  상이 이르기를, "그가 임금을 속인 것이 심하다."최명길이 아뢰기를, "그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 할 때 그 아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이러고도 죽을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상헌의 일은 한 번 웃을 거리도 못 되는데 무식한 무리는 오히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니,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기가 쉽다 하겠다. 호종한 공으로 준 자급까지도 받지 않아서 내가 매우 무안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5년, 9월 6일


김상헌의 입장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류, 국방부 장관 격인 병조판서이자 이민구의 형이었던 이성구, 강화도 방어전 때 종묘의 신주 훼손에 책임이 있던 윤방은 처벌되었으나 최명길이 빠져있는 것은 분통을 터트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해당 사건에서 이성구를 제외하고 최명길을 넣었을 수도 있다. 김상헌의 입장에서는 청나라와 화의를 주도했던 최명길도 병자호란의 패전에 책임을 졌어야 할 사람으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최명길은 영의정에 올랐다. 김상헌의 입장에서는 책임을 지지 못한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김상헌이 비판하려고 한 대상은 최명길이 아니라 인조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병자호란 이후 척화론자들을 적극적으로 비난한 사람은 최명길이 아니라 인조였기 때문이다. B기록을 보면 김상헌을 비난하기 시작한 사람은 인조였다. 또 병자호란의 패전을 둘러싼 논쟁에서 김경징 등을 보호한 인물도 인조였다. 김상헌도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근대 국가에서 왕을 비난하는 것은 역모에 해당된다. 그래서 당시 영의정까지 올랐던 최명길을 인조 대신 비난했을 수도 있다.


혹자는 최명길이 책임을 지지 못한 이유 때문에 남한기략에서 이성구를 지울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남한기략은 일기라는 점이다. 같은 일기 사료를 보면 실상과 다른 부분이 많다. 이를 고려하면 김상헌도 그러한 묘사를 쓸 수 있다. 게다가 일기는 남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여 쓰는 것이다. 이러한 일기의 사료적인 특성을 볼 때 충분히 가능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일기의 사료적 특성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인조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김상헌이 최명길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고 했다면 모를까 이를 악마화, 모함이라는 자극적인 용어를 쓰면서 단정하는 것은 신중하게 검증되어야 한다. 만일에 김상헌이 최명길을 모함하기 위해서, 악마적인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서라면 남에게 보여주지도 않을 일기에 쓸 이유가 있었을까?


(보론) 신적도의 창의일록에 관하여


김상헌이 최명길을 모함했다는 해당 글에는 신적도의 창의일록이 김상헌의 증언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적도는 가계로는 서인인 신흠의 아들이지만 장현광과 정구의 제자로 남인계 인물로 보인다. 그의 관력도 찰방과 참봉을 역임한 것 외에는 의성에만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만일에 김상헌을 통해서 들었다면 두 사람은 증언을 주고받을 정도로 당파를 초월한 관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창의일록에는 김상헌을 통해서 들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신적도와 김상헌이 증언을 주고받을 만한 관계도 찾아지지 않는다.


김상헌에게 들은 것이 아니라면 신적도는 어디서 국서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을까? 당시 국서와 관련된 내용이 병자호란과 관련된 사료에 여러 형태인 것을 볼 때 신적도는 병자호란 이후 창의일록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신적도가 쓴 내용을 보면 다른 사료들과 비교할 때 이성구를 제외했고, 최명길이 킬킬거렸다는 묘사까지 제거했다. 그렇다면 신적도가 창의일록을 쓴 시기는 그가 1663년까지 생존한 것을 보면 더 늦게 잡을 수도 있다.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한 점, 효종이 산림 세력들을 등용한 점, 산림들이 집권한 점을 감안하면 그는 산림들이 집권한 분위기에 부응하여 그가 국서에 관련된 여러 기억들 중에서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혹자는 김상헌이 병자호란 이후 안동에 내려간 것을 이유로 신적도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김상헌의 연보에 의하면 의성에 간 기록은 없다. 게다가 신적도가 김상헌을 만나서 증언을 채록했다면 남한기략의 내용과 일치해야 한다. 하지만 국서와 관련한 기억에는 창의일록에는 최명길이 웃었다는 기록은 없다. 또 남한기략의 사료적 특성상 이 시기에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론) 승정원일기의 1637년 4월 4일 기록에 대해서


최근에 김상헌이 최명길을 모함했다는 글에 승정원일기가 추가된 것을 보았다. 승정원일기의 내용은 최명길이 국서를 찢은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이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서 필자의 주장이 더 보강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당 내용을 볼 때 김상헌도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킬킬거렸다는 표현은 위에서 언급한 병자호란의 패전 책임 논쟁과 연관시킬 때 김상헌이 최명길을 비판하기 위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상헌이 이성구를 지우고 최명길을 기록한 이유는 사료비판적인 측면에서 기억이 혼란했거나, 병자호란의 패전과 관련한 논쟁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물론, 최명길이 옳다 김상헌이 옳다 할 이유는 없다. 일기의 사료적 특성을 고려하면 최명길이 일기를 썼어도 김상헌을 비난하기 위해 이성구를 지울 수 있다. 김상헌도 마찬가지다.


물론, 척화파에 의해 기록된 사료만으로 병자호란을 재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척화파에 의해 기록된 사료라고 해서 "왜 그렇게 기록했는가?" 하는 사료비판 없이 해당 사료의 기록을 모함으로 단정할 수 없다. 이는 조선사뿐만이 아니라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도 마찬가지다. 모함으로 규정하려면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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