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에게.
지금, Ann&Max라는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항상 사람들이 많아서 좀처럼 들어가 볼 수 없었던 곳입니다. 유럽은 도난이 많아서 잠깐 한눈을 팔면 물건을 도둑맞는다는 말에 제 짐들을 시야 안에 놓았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짐을 그냥 아무렇게나 두는군요. 이곳이 대도시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다 알고사는 작은 도시라서 그런 걸까요? 방금 카푸치노를 주문했습니다. 저는 한국카페에서 처럼 주문을 하고 돈을 지불한 다음 커피를 받는 방식을 생각하고 계산을 하려 했는데, 잘생긴 남자 직원이 앉아있으면 주문을 받는다는군요, 몇 번 음식점을 가보면서 느낀 것인데 여기는 손님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직원이 다알아서 해줍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처럼 손님이 원할 때 키오스크나 직원을 통해서 바로 결제, 주문을 할 수 있지 않고, 직원과 눈을 마주쳐서 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직원들이 매번 필요한게 있는지 체크하러 오기도 하구요 (이런 이유로 외식값이 비싼것 같아요.) 약간의 용기와 느긋함이 필요하기도 하죠. 방금 카푸치노가 나왔습니다.
통유리를 통해서 보는 도시는 사람들로 아주 분주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어요. 아주 어렸을 때 베트남에 갔을 때 도로를 가득 채운 오토바이와 자전거의 양에 압도된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돈 아니지만, 이곳에선 자전거를 타는 것이 일상이고 필수입니다. 하지만 S도 알다시피 저는 자전거를 아직 잘 못 탑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게다가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이미 사버렸어요. 로테르담의 집주인아주머니(이분은 중국인인데 규칙에 아주 엄격하고 꼼꼼하며 서류 작업에 철두철미 하신 분이죠. 그래서 이 물가 비싼 네덜란드에서 살아남았나 봅니다.)가 중고 자전거를 살 거냐고 물어와서 그러겠다고 해버렸거든요. (이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제가 같은 말을 또 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와이파이 패스워드를 알기 위해선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혹시나 도난당할까 걱정되어서 옆자리 여성분에게 제 짐을 봐달라고 했습니다.
(고작 5초 정도지만..) 어쩐지 왜 호들갑을 떠느냐는 듯한 미소를 짓는 것 같군요. 물론 제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가진 짐 중에 가장 값나가며 생활에 필수적인 이 노트북을 잃어버린다면 저는 아마 절망하여 한국행 티켓을 끊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 당장 그러고 싶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3개월은 버티자는 다짐을 했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집니다. 3개월이 너무나 까마득해요. 고작 7일 지난 지금도 너무나 제방이 그립거든요.
지금까지 제 징징거림을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아마 S가 바라는 글은 이런 게 아니겠죠.
아마도, 네덜란드의 아름답고 이국적인 풍경과 특이한 행동양식과 문화 같은 것일까요? 나도 이런 것들을 내가 본 대로 잘 써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잘 서술하는 데는 별로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그때그때 느끼는바만 두서없이 적어 내릴 뿐입니다. 솔직히 나도 놀라워요. 이곳의 예쁜 주택들과 상점,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되는 체구의 사람들, 식문화 같은 것들에 크게 놀라거나 동하지 않는 것이. 아직 침울한 감정이 저를 지배해서 그런 걸까요? 시간이 좀 지나 어느 정도 마음이 편안해지면 이런 풍경들이 눈에 들어올까요? 모르겠습니다. 제 영혼이 늙어버린 것일지도요...
어제와 오늘은 제법 날씨가 좋습니다. 어제 처음으로 햇빛을 본 것 같아요. 날씨가 화창한 날의 레이던은 어딜 봐도 동화 같고 천국 같아요. 다 아름다워서 어딜 찍어야 할지 모르겠는 정도입니다. 이렇게 날씨에 따른 풍경과 심경의 변화가 클 수 있다니요. 바람 한점 없고 비도 오지 않으며 아주 여유로운 아침이었습니다. 제가 이곳 네덜란드에 온 이후로는 계속 우중충하며 비바람이 부는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전혀 햇빛을 볼 수 없었고요.
젖은 롱코트와 23킬로의 캐리어를 들고 (안경에는 물방울이 가득 맺혀 보이지 않은 채) 비참하게 거리를 떠돌던 첫날이 생각나는군요. 다행히 친절한 한 동네분의 도움으로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제는 제 룸메이트와 레이던의 작은 상점들을 다녀봤습니다. 작은 텀블러(스테인리스 부분이 물의 온도에 따라 너무 차갑거나 뜨거워져서 산 것이 약간 후회됩니다)와 3장의 엽서를 사고, 쇼콜라티에가 운영하는 초콜릿 상점(OLALA)에서 견과류가 박혀있는 다크 초콜릿과 원두모양이 커피 초콜릿을 샀습니다. 역시 쇼핑을 하니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이렇게 소비를 하며 쉽게 기분이 바뀌니, 저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입니다. 어쩔 수 없지요. 환경과 사람들에게서 위안을 받지 못하니 물건들에서라도 위안받을 수밖에요. 부지런하게 자전거로 통근하고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조깅을 하는 더치인들을 보자니, 일도 하지 않고 계속 먹고 마시며 소비만 해대는 제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무기력해지기도 하고요.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소득 없이 소비만 해대다간, 언젠가 통장 잔고가 바닥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늘 마음 한편에 있어요. 이렇게 타향살이가 쉽지 않을 것임을 대충 예상했지만 잘 알아보지도 않고 이곳으로 와버린 과거의 나를 반성합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충동적인 선택을 하는 인간이고, 그 선택에 책임져야 하는 수밖에요.
이곳 상점에서는 아주 귀여운 크기의 물건들이 있어요. 마치 난쟁이들이 쓸 것 같은 크기의 치즈 그레이터나 소금통 크기의 잼병 같은 것들이요. 사람들의 다양성을 존중해 주는 국가이다 보니, 물건들의 크기도 정말 다양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저는 요즘 주택들의 초인종 버튼을 찍는 취미를 만들었습니다. 집주인들의 손글씨와 디자인이 다 제각각이어서 재밌어요. 한국처럼 일률적이고 무개성한 도어록이 아니구요. 아그리고 대부분 열쇠를 이용해 문을 엽니다. 번호나 지문을 인식하는 도어록은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이 사진들을 모아서 어디에 쓸진 모르겠습니다.
Ps. -그저께 다른 워홀러분을 만나러 로테르담에 갔는데, 그 이야기를 쓰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군요. 그 이야기는 다음 편지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S가 바란대로 몇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워홀카페를 통해 알게 된 제 또래분들입니다. Y라는 분은 11월에 이미 네덜란드의 더치 남자친구집에 도착해서 저보다 훨씬 네덜란드에 대해 잘하는 분인데 자칭 저의 네덜란드맘입니다. 이분이 없었으면 저는 서류준비에서 그냥 포기했을 것 같아요. 어딜 가든 커뮤니티는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더치 친구들도 사귀고 싶은데, 그전에 기본적인 더치어를 익혀야 할 것 같아요. 홀랜드의 역사도요! 머물 곳의 언어와 역사를 알지 않고는 깊게 들어갈 수 없음을 느낍니다.
-이전에 받은 메일에서 글씨가 너무 작아서 읽기가 힘들더군요! 글자크기를 좀 키워주세요.
P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