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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마 Feb 28. 2023

D+9-10

Leiden 에서 Rotterdam으로

2/2/23 Thu 9:31

저번 편지 이후로 오랫동안 답장을 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레이던에서 로테르담으로 이동하면서 심정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바빴습니다. 다행히 기록돼 있는(레이던에서) 이전에 쓴 글들을 모아서 보내드립니다. 로테르담의 셰어하우스로 온 지 이 주 정도가 되어가네요. 이번 주는 힘들었습니다. 로테르담에서 놀고먹으며 일도 안 하면서 뭐가 힘드냐며 복에 겨운 한 여자의 징징거림으로 들리겠죠. 물론 일정 부분 맞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누구나 내면의 불안을 가지고 있고, 남들이 보는 모습과 상관없이 그 불안은 시도 때도 없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는 특히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에너지가 많이 듭니다. 예민해지기도 하고요. 그 예민함이 나를 향하면 상관없지만 주변 사람까지 괴롭히면 그땐 저 자신이 더 싫어집니다.

잠시 너무 심각해졌는데요, 여기 사는 매일이 힘든 건 아닙니다. 한국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저는 언제나 먹는 것엔 진심이니까요. 하지만 뚜렷한 목적도 없이 온 이곳에서 나는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허무함이 들 때가 문득문득 있습니다. 막연히 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는데 뭐 인생이 그렇듯 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도 않고, 아직은 거주 허가증이나 신분증이 없어서 활동이 제한적입니다. S에 보낼 글들을 찾다가 레이던에 있을 때 썼던 글을 읽어봤습니다. 그때도 환경에 대해 불평불만이 많았는데, 오히려 그 모습에서 활기가 보이네요. 그렇게 혼자가 되고 싶어 하더니 정작 혼자 지내니까 외로워하는 꼴이라니...

제가 한국에서 먹던 약이 있습니다. 저는 그 약이 떨어질까 봐 점점 먹는 양을 줄이고 있는데요. 이틀에 한 번 먹는 꼴로요. 아무래도 그것이 호르몬에 영향을 줘서 기분과 식욕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약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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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밀조밀하게 붙어있는 기우뚱한 건물

D-10, 21/01/23 Sat 10:12

아침에 노트북을 볼 일이 있어 메일함을 열다가 S의 답장을 보았습니다. 편지를 받는 것은 제가 즐거워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실물 편지 봉투를 받았을 때 보던 흥분감이 덜하긴 하지만 메일함에서 발견하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여수로 내려갔다니 부럽습니다. 저도 설날을 집에서 느긋하게 보내고 싶군요. 아니, 무엇보다 제방에 홀로 있고 싶어요. 격하게 홀로이고 싶습니다! 왜냐면…. 저는 한 방을(싱글 베드 두 개가 있는) 제 룸메이트와 공유하는 에어비앤비를 2주나 예약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오로지 혼자만있을 수 없는 공간이 없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화장실 갈 때 뿐이에요. 오해하진 마세요. G는 착하고 털털하며 제가 하자는 것은 거의 흔쾌히 동의해주고 친구도 많은 외향형 인간입니다. 문제는 사실 제 쪽에 있는 것이죠.  저는 매우 예민한 인간이라 낯선 장소에서는 잠을 잘 설치고 잠귀도 밝아서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 들려도 깨는데 (저의 이런 점이 저도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G는 베개에 머리 만대도 곧바로 잠에 들고, 잘 깨지도 않습니다. 뭐 여기까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죠, 그런데 코골이가 심합니다. 피곤한 날에는 더욱이요. 코끼리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 방은 좁아서 두 개의 침대가 정말 가까이 붙어 있는데,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자면서 적어도 평균 5번은 깨는 것 같아요. 제가 기침을 하고 손가락을 튕기기도 하고 별짓을 다 해도 절대 깨지 않아요. 이분은 낮잠을 4시간 자고도 밤에 잠들어서 평균 10시간 이상을 잡니다. 다른 환경에서 지내온 남남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생활 스타일이 정말 다릅니다. 아무튼 빨리 저의 로테르담의 방(아니 서울의 방)으로 가고 싶습니다….


11:53

데이빗, 버나비와 함께 산책

오늘 레이던의 날씨는 아주 좋습니다. 햇볕을 쬘 수 있어요. 아직까진.

오늘 저의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데이빗와 그의 반려견 버나비가 저의 산책 동료가 되어주었습니다...사실 제가 데이빗에게 부탁했어요. 어제 제가 Ann & Max 카페에서 돈을 지불하지 않고 나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자 가기가 왠지 무서워서 데이빗에게 부탁했기 때문이에요…. 어젯밤에 저는 제 룸메이트와 유럽의 카페문화에 관해 얘기하던 중 커피 가격을 확인하려고 어플을 켰는데, 아무것도 결제되지 않았고 알고 보니 돈을 지불하지 않고 그냥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혼비백산했습니다. 저를 먹튀하는 동양 여자로 오해할 뿐만 아니라 동양인 전체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심어질까 봐서요. 저번 편지에서 말했다시피 여기는 선결제가 필수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후불이 필수도 아닌 것 같아요. 가만히 있으면 웨이터가 물어보는 대로 대답하면 됩니다. (오늘 데이빗이 소개해 준 술집 겸 카페에 갔는데, 웨이터가 계산을 지금 할 건지 나중에 할 건지 묻더군요.) 다행히 데이비드가 그 카페의 웨이터와 아는 사이라고 해서 데이비드와 버나비를 대동하고 갔습니다. 제가 영어로 횡설수설 설명하니 괜찮다고 이해해주더군요. 저는 엄청난 걱정쟁이에 막상쟁이라 어젯밤부터 여러 가능한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에서 돌렸답니다. 여자 웨이터가 사방에 감시 카메라가 있음을 보여주고 제가 먼저 자수한(?) 것에 대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블랙리스트에 올라갈 뻔했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계산하고 데이빗이 1.50유로(Ann & max는 카푸치노 한잔에 3유로가 넘었습니다.)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술집 겸 카페를 소개해줬습니다. 대신 12시 이전까지이며 안에서 마실 수가 없다더군요? 카페에서 노트북 하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한국에서 저는 항상 제 무거운 맥북을 카페에 가지고 가서 여러 가지 일을 했지요. 아무것도 안 하기도 하고요. 이젠 텀블러에 1유로짜리 커피를 담고 도서관을 집처럼 가야겠습니다.

술집 겸 카페에는 신문지의 크로스 워드 퍼즐(십자말풀이) 문제를 풀고 있는 어떤 더치 아저씨가(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있었습니다. 그와 잡담했는데 아저씨는 영어를 잘 못하고 저는 더치를 못해서 많은 대화는 하지 못했습니다. 데이빗은 이동네의 대부분 사람과 아는 것 같더군요.

앗 지금 고양이가 도서관에 난입했어요! 도서관을 배회하고 다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요. 네덜란드는 pet friendly 해서 카페나 음식점에 중형견을 들여도 됩니다. (일반화할 순 없지만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뭔가 다이내믹한 일들이 있었네요! 뭐 숙소에서 핸드폰만 보고 있는 것보단 훨씬 좋습니다.


PS. 계산해보니, 지난 5일 동안 식품비만 100유로 넘게 썼더군요. (그 외, 한국에서 온 택배 착불, 생필품, 우편비 등등을 합치면 더합니다) 필요한 것만 산다고 썼는데, 이 지경이니. 이 나이까지 경제관념이 전혀 없습니다. 데이빗에게 5일간 100유로를 썼다고 하니, 두 명이 그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고 말하더군요. 1인당이라고 했더니 too much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짠순이로 살아보렵니다.

쌍둥이 같은 문

저는 '티빙'에서 '유미의 세포들'이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었는데, 네덜란드에서는 이 플랫폼이 지원되지 않아서 못 보게 되어 슬픕니다. 요즘에는 아무런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책도 못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울한 듯) 바보같이 1년 정기 구독까지 신청한 이북 리더기를 집에 놓고 왔고 엄마한테 배송해달라고 해서 받았는데 엄마가 다른 걸 보냈으며, 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빈지워칭하는 습성이 있어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을 봐서 영화를 볼 시간이 없습니다.


P드림.


에어비앤비 가족들의 반려견 버나비. 살갑고 아기처럼 행동한다. (언제 씻기는 건지 항상 Stincky 했다.)
가족들을 기다리는건지 항상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버나비
데이빗과 가족들에게 만들어준 새우 계란 볶음밥
청명한 날의 레이덴
도서관에 들어온 고양이
친구와 이 주 동안 머무른 방. 호스트의 가족들과 한 집에서 지내야해서 조금 불편했다.
화장실에서 고독을 즐기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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