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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리 Apr 24. 2020

친구가 될 기회조차 없었던

진선생을 떠올리며


  모두가 술잔을 들고 내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머리가 새하얘져서 아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거나 준비할 새도 없이 내 이름이 호명되면 가끔 ‘치트키’처럼 써먹곤 하는 건배사가 있다. 이 건배사를 하면 ‘탁월! S!’까진 아니어도 ‘뭐 그래 무난. B-’ 정도의 평가를 얻을 수 있다. 매년 12월 건배사로 고통받는 이라면 “그게 도대체 뭔가요! 좋은 건 같이 좀 압시다!”하고 기대하실지 모르겠으나, 다른 업계에서도 적용될지는 모르겠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쭉- 냅시다!”. ‘엥? 그게 뭐야?’라고 생각하셨죠? 아마 들어보신 분이 거의 없으시리라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38선 이북에서 쓰는 건배사이기 때문이다.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은 시민단체로, 평화교육이나 정책토론회, 해외동포 지원사업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지만 가장 메인 사업은 대북 인도지원이다. 쉽게 말해 북한에 정치적, 경제적 목적이 아닌 인도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다. 밀가루나 콩기름 같은 식량 지원부터 수액 공장을 짓거나 현대 농사기법을 알려주는 개발 협력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북을 지원하고 협력해나가고자 하는 단체이다. 1996년 설립하여 2009년까지, 우리끼리 황금기라 부르는 시절에는 실무자들이 3박 4일씩 평양으로 출장을 가기도 했었다. 22년 근속 후 얼마 전 퇴직하신 최고참 선배는 그 당시 1년 365일 중 서울보다 평양에 계실 때가 더 많았을 정도라고.

  그렇게 북에 사나흘씩 가 있다 보니 낮에야 일할 테지만, 해가 지고 나면 놀 거리가 마땅치 않았단다. 가진 거라고는 기나긴 밤과 각종 알코올. 그래서 밤마다 북한 참사들과 함께 “쭉- 냅시다(쭉 마십시다)!”라고 하며 술잔을 부딪치고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하지만 2010년 5.24 조치 이후로 남북의 교류가 중단되었고, 선배들은 술자리에서 옛날을 추억할 때마다 다시 그들과 술잔을 기울일 날을 기다리며 수년째 이 건배사를 외치곤 한다. 자매품으로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가 있다.

  이쯤 이야기하면 “그럼 너도/선생님도/두리 씨도 북한에 가봤어(요)?”라는 질문은 필수 코스. 운이 좋게도 2015년 개성에 두 번 다녀온 경험이 있다.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2010년 이후 입사한 사람이라면 어느 단체든, 기관이든 정말 북에 가 볼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나 역시도 4년 전의 경험을 5대째 전해 내려오는 전통 사골 맛집 육수처럼 우리고 또 우리며 그나마 대북지원단체 활동가로서의 ‘면’을 세우고 있다.

  개성의 기억을 떠올리면 꼭 함께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20대 중반의 여성으로, 그 당시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북에서는 나온 여성 네 명과 남성 네댓 명 중의 한 명이었다. “반갑습네다!” 북쪽 남북출입사무소를 통과한 우리를 맞이하며 환히 웃는 그들의 재킷 왼쪽 카라에는, 그들처럼 환히 웃고 있는 두 사람이 그려진 붉은 배지가 달려있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을 그 두 명의 얼굴은 내게 ‘내가 정말 북한 사람과 만났구나’하는 현실을 느끼게 해 주었다.

  북의 참사로 나오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남쪽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교육을 받고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녹음기처럼 준비된 멘트가 줄줄 나오는데, 예를 들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여러분이 오신다는 소식에 설레어서 어제부터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3초 안에 소리 내 읽어야 함)” 이런 식. 분명 잠을 못 잘 정도로 설렜다는 말인데도 듣자마자 거리감이 느껴지는 멘트. 아마 그들도 긴장하기 때문에 더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진송희는 조용하고 수줍은 사람이라 오히려 더 편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를 성씨에 ‘선생’을 붙여서 불렀다. 그는 진 선생이었고, 나는 양 선생이었다. 나는 진 선생에게 조심스럽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진 선생은 집이 개성인가요? 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했습니까? 기념품으로는 뭘 사가면 좋을까요? 저건 무슨 뜻이에요?” 등등. 진 선생은 미소를 띠며 자신이 개성에 살고, 동양화를 전공했다고 말했다. 기념품을 고를 때는 술도 추천도 해주었다. 사람들을 챙기느라 많은 대화를 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가끔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곤 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전보다 더 편해져서 이동할 때 팔짱을 끼기도 하고 내가 가져간 카메라로 함께 셀카도 찍었다.


진선생과 나


  그렇게 두 번째 방북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진 선생과 인사를 나누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너와 나는 이제 아마, 아니 분명히 다시 만날 일이 없겠지. 다시 만날 수가 없겠지, 죽을 때까지. 마지막이라는 말은 정말 마법과도 같아서, 어디에 갖다 붙여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 마련이다. <호텔 델루나> 마지막 화를 보면서도 ‘장만월 사장님 가지 마요’하고 입을 틀어막았고, 저주를 퍼붓고 싶던 회사 선배도 마지막이라고 하면 ‘그래, 나쁘기만 하진 않았어’라며 아련해질 마당에, 웃음을 나눈 사람과의 마지막은 오죽할까. 나는 아쉬움을 가득 담아 남쪽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계속 손을 흔들었다.


  내가 다녀온 후 마지막 팀으로 개성에 가는 동료에게 내가 끄적끄적 그린 진 선생의 얼굴 그림을 보여주며 “이거 진 선생한테 보여주세요!”라고 전했다. 다녀온 동료의 말로는, 진 선생은 매우 기뻐하면서 간직하고 싶으니 이거 찢어서 달라고 했는데 자기가 정신이 없어서 주지 못하고 왔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게 진송희와의 마지막 기억이다.

  아마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는 다른 점이 많이, 아주 많이 있었을 것이다. 사는 나라도, 체제도, 상황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를 테니까. 서로 감정이 상해서 더는 연락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피부 트러블에 대해 고민하고 손님맞이용으로 신은 하이힐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와 같은 또래들이었으니까.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우리가 친구가 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상황 때문이다. 내가 아는 누군가를, 심지어 함께해서 즐거웠던 누군가를 마지막 숨을 내뱉을 때까지 만날 수 없을 것이 99.9999% 확실하다는 것. 그래서 자꾸 진송희를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상상해본다. 진 선생과 대동강 맥주를 즐기는 풍경을. 그때는 병따개를 찾는 그를 말리고 숟가락으로 뚜껑을 시크하게 뻥- 따며 오른쪽 입꼬리를 씩 올려야지. 아마 그럼 진 선생은 ‘잘하십니다’하며 활짝 웃을 것이다.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아지면 이런 것도 묻고 싶다. “진선생네는 건배사가 ‘쭈욱 냅시다’ 밖에 없어요? 아니, 우리 선배들은 맨날 북쪽 얘기할 때마다 그 건배사를 하더라고. 벌써 5년째라니까요? 그렇게 많이 마셨다면서 그거밖에 없나? 남쪽에서는 건배사 할 때 줄임말이 유행이에요, 오징어! 이거는 오래오래 징하게 어울리자, 이런 뜻이래요. 표정 왜 그래요? 별로예요? 흠 또 뭐가 있더라~”


사진 찍는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진선생


*참사: 남쪽을 상대하러 나오는 북쪽 사람들을 뭉뚱그려 ‘참사’라고 부르곤 한다.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명사] 1. 어떤 일에 참여함. 또는 그런 사람. 2. 기업체, 단체 따위에 두는 직위의 하나. 또는 그 직위에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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