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앨리스 May 09. 2024

울엄마 남친이랑 싸워서 집에 가야해요.

어머님, 이건 좀 아니잖아요.

수년 전 여름, 그 당시 근무했던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샘, 저 집에가야되요. 조퇴증 주세요."


점심시간, 급식을 먹고 자리에 앉자마자 2학년 민석이가 들이닥쳤다. 다짜고짜 조퇴증이라니, 어림도 없다.


"갑자기? 집에는 왜?"

"울엄마 울고있단 말예요. 저 지금 빨리 가야해요."

"엉??"


그 당시 근무했던 학교는 아이들의 학습 동기나 학업 성취율이 평균보다 상당히 낮은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7교시까지의 학교 수업을 견디지 못하고 다양한 몸의 통증을 호소하며(연기하며) 조퇴를 요구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번에도 당연히 어떤 앓는 연기를 하려나 기대 했는데 갑자기 엄마 얘길해서 살짝 당황했다.

오, 이것은 신선한 레퍼토리인가.


"혹시 어머님이 어디 편찮으시니?"

"아뇨. 아픈게 아니라.. 아니다. 아픈거 맞아요. 마음이 아픈거죠."

"그으래...?"


난감했다. 민석이 어머님은 싱글맘이다. 민석이 아버지와 이혼하시고 수년째 민석이와 민석이 동생을 키우고 계신다. 민석이 말이 사실이라면, 혹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건 아닐까? 일단 무슨 일인지 자세히 물어보기로 했다.


"민석아, 혹시 집에 무슨 일 생긴거니?"

"그게요 샘, 오늘이 울엄마 생일이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오늘 일 쉬고 남친이랑 논다고 했단 말예요. 근데 아까 전화와서 막 우는거에요. 엄마 남친이랑 싸워서 남친이 밥도 안먹고 그냥 갔대요. 그러니까 엄마가 마음이 아프겠죠? 그래서 또 술을 먹었겠죠? 술먹었으니까 또 울고 있는거죠."

"어... 음... 그래 많이 힘드시겠구나.. 음.."

"생일인데 엄마 남친도 싸우고 가버렸으니 얼마나 슬프겠어요. 저라도 가봐야죠. 안그래요 샘?"


아니, 안그렇단다 민석아. 보통 엄마들은 본인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자식이 학교 수업을 빠져가며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아. 보통 엄마라면 말이지.

휴,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약간 헷갈렸다. 민석이는 정말로 엄마를 위로하러 가고 싶은걸까, 엄마는 그냥 핑계고 어디 나가 놀려고 궁리하고 있는 것일까. 어찌됐던 두 가지 이유 모두 조퇴 사유에 해당되진 않는다. 어머님은 괜찮으실거라고, 7교시 끝나고 가도 충분히 괜찮다고 민석이를 살살 어르고 달래서 조퇴증은 줄 수 없다고 돌려보냈다.

민석이는 평소 흔히 말하는 심한(?)불량 학생은 아니다. 비록 흡연을 조금 하고 지각과 결석이 약간 있지만 교사들에게 선을 넘는 버릇 없는 행위를 한다던가 약한 애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금품을 갈취하진 않는다. 공부를 싫어하긴 하지만 아예 막나가는 아이는 아니다. 아마도 반반 이었을 것이다. 엄마 걱정 반, 학교 탈출의 기회다 싶은 마음 반.

사실 민석이는 그 이전에 몇 번 엄마 때문에 지각을 했었다. 어느 날은 엄마가 술병이 나서 약을 사다 주느라 늦었었고, 또 어느 날은 아침까지 엄마가 연락 두절이 되었다가 술집에서 연락이와서 데리러 갔던 경우도 있었다. 민석이가 하루하루 나이를 먹고 몸이 커져 엄마 키를 훌쩍 넘어버리니 엄마 자신도 모르게 민석이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커져갔을게다. 민석이는 엄마를 불쌍히 여기며 엄마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가끔 학교를 빠지거나 늦게 갈 수 있으니 죄책감 없이 학업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속상했다.  

민석이의 가정사는 대부분 교사들이 알고 있다. 이런 사건들이 하나씩 생길때마다 대부분의 교사들의 머릿속엔 비슷한 키워드의 데이터베이스가 생성된다.

'불우한 가정환경', '결손가정', '이혼한 싱글맘'의 자녀는 거의 대부분 '학업 부진', '부족한 인성', '말썽쟁이' 이며, '불쌍' 하다고. 절대 내 자식들은 온전하지 못한 가정의 자식들과 결혼 시키지 않겠다고. 그리고 이런 인식은 학교를 넘어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있다. 한부모 가정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과 차별은 이혼을 망설이게 하고 이혼 후에도 실체 없는 죄책감을 지고 살게 만든다.

세상에 무책임한 부모는 많다. 그들 중엔 싱글맘, 싱글대디인 한부모도 있지만 '두 부모'도 있다. 세상에 책임감을 갖고 사랑과 헌신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두 부모'가 많은 것 처럼 역시 훌륭한 싱글맘과 싱글대디도 많다. 그동안 학교에서 만났던 모범적인 학생들이 한부모 가정의 자녀들인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사례는 금방 잊혀지고 '민석이 엄마'와 같은 사례가 한부모 가정의 사례로 기억이 된다. 우리 사회는 유독 '정상 가정'이 아닌 한부모 가정에게 유독 더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것 같다. 싱글맘은 잘해야 본전이고 잘 못하면 가혹한 질타를 받는다.

그렇기에 안타깝지만 우린 더 잘해야한다. 안 좋은 사례들만 가지고 일반화 하는 세상의 시선은 분명 옳지 않다. 하지만 안 좋은 사례를 만드는 분들도 그러시면 안 된다. 민석이 어머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정신을 차리셔야 한다. 좀 더 강해지셔야 한다.


만약 이혼을 한 지 얼마 안 된 분들, 혹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래도 여전히 힘든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계신다면, 붙들고 간곡히 말씀드리고 싶다.

정말 힘들겠지만 술과 연인과 자녀에게 의지하는 것만은 피하셔야 한다고,

어떠한 순간에도 나 자신을 내가 컨트롤 하고 내가 '나'인 상태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그래야지만 더욱 단단해지고 경제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온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을거라고,

정말 간곡히 말씀드리고 싶다.

온전한 독립이 이루어져야 자녀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될 수 있고, 안정적인 양육자가 될 수 있다. 이후 다시 연애를 하고 재혼을 하더라도 과거와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는다.

물론 두 사람이 같이 해도 힘든 바깥 일, 집안 일, 자녀 양육, 거기에 내 자신까지 돌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응원은 커녕 잘 못하면 혼낼 준비만 하고 있다.

하지만 까짓 거, 우리가 못 할 것도 없다. 쉽지 않다는거지 불가능한게 아니다. 이미 너무나 잘 해내는 동지들도 숱하게 많다.

기왕 이혼을 결심하고 선택했다면, 잘 살자.

'살기 위해' 한 선택 아닌가. 그것을 헛되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이 손가락 질 하며 모든 불행의 원인을 이혼으로 돌릴 때, 당당히 웃기지 말라고 말할 수 있도록 강하고 행복해지자. 민석이 어머님이 더 이상 울면서 민석이에게 전화하는게 아닌, 민석이의 진로와 이성문제를 든든히 상담해 줄 수 있는 어머님이 되시길 응원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