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앨리스 May 09. 2024

그래도 내가 이혼한 너 보다는 나아서 다행이야.

나를 보며 위안 삼는 너, 과연 누가 불행한걸까.

퇴근 후 아이와 저녁을 먹고 숙제를 봐주며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저녁 9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발신자는 나와 오랜기간 친분을 쌓았던 동갑내기 육아동지 민지(가명) 엄마. 이사오기 전, 그러니까 이혼 전 살던 동네의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오며가며 육아의 고단함을 수다로 함께 풀곤 했던 친구.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연스레 만남도 소원해지며 연말에나 안부를 주고 받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혼 후에는 한달에 한 번 꼴로 전화를 하는 것 같다. 전화를 받기 망설였던 것은 이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거는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명 요새 또 무언가 안 좋은일이 있었을테다. 처음 몇 번 통화 할 때는 그냥 민지 엄마가 많이 힘든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통화할 때 마다 본인의 힘든 이야기를 쭉 쏟아낸 후에 나의 근황을 집요하게 묻는 패턴을 보니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나에게 전화하는 이유를. 나는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잘 지내~? 있잖아, 민지 아빠가 또 사고쳤잖아. 이직한지 얼마나 됐다고 또 때려치고 온거야. 상사가 너무 꼰대라면서 한 판했다고, 이딴 회사 안 다닌다고.. 나 진짜 그 새끼 때문에 미치겠어."


민지 엄마 말에 의하면, 민지 아빠는 참 일관성 있는 남자였다. 결혼 후 지금까지 쭈욱 주기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사고를 쳤고 그럴 때마다 다신 안그러겠다고 싹싹 빌었으며, 얼마안가 또 비슷한 사고를 치는 한결 같은 태도를 보였다. 민지 엄마는 강한 여자였다. 숱한 위기에도 꿋꿋하게 참아내며 가장의 역할을 대신해왔다. 일주일 전부터는 본업 이외에 새벽배송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 저녁에 화장실에서 코피를 흘리며 휘청거리는 자신을 보니 너무 속상해서 펑펑 울었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본인의 슬픔을 쏟아내었다. 나는 묵묵히 들으며 니가 고생이 많다고, 그래도 건강이 우선이니 일은 줄이는게 좋겠다고, 주섬주섬 위로의 말을 늘어 놓았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자 마자, 예상했던대로 그녀의 질문이 이어졌다.


"넌 어때? 혼자 애키우기 많이 힘들지?"


왠지 '응, 힘들어 죽을 것 같다'라는 대답을 해야할 것 같다. 너무 확신에 찬 질문이라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결국 내 대답이 없자 그녀는 내가 왜 힘들어야만 하는지 계속 읊어준다.

"애가 아빠 보고싶다고 하지? 어휴 얼마나 보고싶어할까. 천륜인데, 당연하지. 내가 그것 때문에 민지 아빠랑 계속 살잖아. 너도 알지? 우리 민지 아빠가 애들한테는 엄청 끔찍하잖니. 양육비는 제때 주니? 얼마 안 주지? 너 혼자 일하고 애키우느라 너무 힘들겠다. 이제 애들 학교들어가서 돈도 많이 필요한데.. 어쩌니?"


분명 아까까지 그 새끼라고 불리던 민지 아빠는 갑자기 우리 민지 아빠가 되었다. 난 힘들다는 말을 한마디도 안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세상 불쌍한 삶을 살고있는 여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나를 더 불쌍한 여자로 만들면서 만족감을 얻고 전화 통화를 마무리한다.

"이런 속썩이는 놈이라도 없는 것보다 있는게 낫지 싶어서. 애들 생각해서 그냥 내가 참고 살아야지 뭐. 너도 힘내고, 건강 잘 챙겨~"


통화가 끝난 다음, 잠시 고민하다가 차단 버튼을 눌렀다. 오늘로 마지막이다. 더 이상 그녀의 셀프 위안에 이용 되고 싶지 않았다.

아마 민지 엄마는 전화를 끊고 안심했을 것이다. 이혼한 친구는 역시나 힘들게 살고 있었다는걸 확인했으니까. 뭣 같은 남편이라도 이혼안하고 참으며 가정을 지키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을테다.

그녀의 밑바탕에는 양부모가 존재하는 '우리'가 온전한 가족이며, '혼자' 양육하는 나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나를 노골적으로 깔아뭉개고 올라서서, 자신의 삶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며 참 다행이라고 안심한다.

자신의 불행의 무게를 못 견뎌 타인의 불행을 더 크게 만들고, 그 크기를 비교하며 스스로 위안하는 삶. 그녀는 그런 방법을 통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다. '그래도 내가 이혼한 너보다는 나아.' 라고.


언젠가 그녀가 최면에서 깨어나 현실을 다시 직면한다면 괴로울 것이다. 그리고 괴로움을 잊기위해 내가 아닌(난 차단했으니까) 더 큰 불행을 가진 다른이에게 연락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그녀가 살아가는 방법이라면, 그렇게 안하면 그 삶을 도저히 못 견디겠다면 별로 할말은 없다. 하지만 끝내 살아남더라도 주변에 누가 남아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렇게 또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 타인의 불행을 양분 삼아 사는 삶, 그거 되게 후진거구나.





작가의 이전글 거 봐, 쟤 딱 봐도 여우같이 생겼잖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