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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아빠 Nov 20. 2019

딸의 죽음 앞에 선 아빠

죽은 육체를 마주한 아침.

"의진아, 힘을 내. 엄마가 왔잖아!"



딸이 죽었다. 중환자실에서 산소마스크와 혈액, 수액들을 꽂은 채 더 이상 의미 없는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하루 전,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 들어간 딸은 다음 날 아침, 아팠던 육체에서 나와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떠났다.


떠나기 전 날 저녁,  면회 시간에 의진이의 입원 기간에 쓸 기저귀와 비닐장갑 등의 물품을 전해주고자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본 딸은 산소마스크를 쓴 채 잠이 들었다.


딸을 바라보며, 아빠가 내일 또 올 테니 일어나자고 말한 후 30분의 면회 시간 중 남은 15분을 아내와 교대하기 위해 문 밖으로 나왔다.


아내는 면회 후 병원에 남아 상황을 지켜보고, 나는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딸은 반드시 일어나서 늘 그랬듯이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밤새 딸을 걱정하며 잠을 뒤척이다가 나도 모르게 잠에 들었고, 출근을 위한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일어나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딸의 상태를 물었고, 밤 사이 진행된 치료를 전해 들었다.


전화로는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음을 알았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급한 일만 끝내고 바로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회사에 도착해 인사관리자에게 딸의 상황을 전하고 1시간 이내 병원으로 출발할 것이라 알렸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자리에 앉아 바로 처리해야 할 업무들만 확인 후 잠시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에 가자마자 전화기가 울렸다. 아내였다. 걱정되는 마음에 조심히 전화를 받았는데, 아내가 절규했다.


"자기야 코드블루 떴어. 응급중환자실인데, 소아청소년과야! 근데 소아과 환자는 의진이 밖에 없잖아! 빨리 와줘!"


전화를 끊자마자 건물 밖으로 뛰어 나갔다. 회사에서 병원까지 차로 20분 거리. 택시를 잡아야 하는데, 공항 앞이라 평소에 많던 택시는 이상하리 잡히지 않았다. 5분 넘게 흘러 잡힌 택시를 탔지만, 가는 길에 도로의 신호는 모두 걸렸다.


10분이 흘러 아내와 통화를 해 딸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으나, 아직 의료진이 와서 설명해준 것은 없다고 했다. '심장이 멎은 의진이를 살리고 처치를 하느라 여념이 없어서 그랬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택시 안에서 흐느끼며 딸이 살아있기만을 기도했다.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아내의 전화가 없었다. 택시가 계산을 위해 멈출 때, 아내의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딸이 죽었다고 걸려온 전화라면, 도저히 딸이 있는 곳까지 두 발로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울리는 전화기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중환자실이 있는 3층까지 숨이 멎을 정도로 달려갔다. 중환자실의 복도에 도착해 아내를 찾았다. 수술실과 함께 있는 복도는 수술 환자들의 보호자들로 가득 차 있어서 아내를 찾기 어려웠다.


복도 중앙에서 두리번거리는 나를 멀리서 발견한 아내는 딸이 힘들 것이라는 의료진의 말을 울면서 토해냈다. 내 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모든 힘을 잃고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고, 숨을 쉴 수 없는 통곡의 소리를 내었다.


주저앉아 우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원심분리기에 넣어 죽게 하는 것처럼 세상이 뱅뱅 돌았다. 그저 내가 살아있음을 알게 하는 건 귀로 들리는 내 울음소리뿐이었다. 딸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 위에서 나를 무겁게 누르며 모든 감각과 생각을 현실과 다른 세상을 향해 흔들어 놓았다.


그렇게 울고 있는데  담당 의사가 나의 팔을 붙잡으며 딸의 죽음이 실제임을 깨닫게 하고, 아이가 누워있는 그 현실의 자리로 안내했다. 팔을 감싸며 붙잡는 순간, 알았다. 내 딸이 떠났다는 것을.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일어나면 딸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일어나서 딸아이를 내 눈으로 봐야 하기에. 내 딸이기에.


"아버님, 힘드시겠지만 일어나서 함께 가세요."

"...... 내 딸 보러 갈게요. 내 딸 볼게요."


담당 의사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힘없이 쳐진 몸을 끌고 중환자실 문을 들어갔다. 두 개의 문을 지나, 딸이 있는 제일 끝 방까지 걸어갔다. 좌우 시야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살아서 누워있는 사람들.


그리고 딸이 격리되어 있던 방 앞에 서니 심폐소생 중인 의료진들 사이에 누워 있는 작은 내 아이가 보였다. 이미 꺼져 있던 모니터, 살아나길 비는 간절함을 잃고 부동의 자세로 애도하는 의료진들.


담당 의사에게 몇 분 동안 심폐소생술이 진행됐냐고 힘없이 물었다. 의사는 20분이었다고 대답해주었다. 나에게는 사망선고와 같았다. 이미 딸은 내가 아내에게 전화를 받고 택시를 타고 오는 도중에 떠난 것이었다.


다시 주저앉으려는 몸을 문에 기대고 버텼다. 그리고 더 이상 딸의 몸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의료진들 한가운데로 걸어가, 흉부 압박을 하던 의사의 팔과 공기를 주입하는 앰부를 짜던 간호사의 손을 잡았다.


코와 입에 피를 흘린 채 거친 압박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누워만 있던 딸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딸의 얼굴에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의사의 입에서 불린 사망선고를 듣고 울 뿐이었다.


"2019년 6월 24일 09시 06분. 오의진님이 사망하셨습니다."


"아니, 이렇게 아직 따뜻한데!"


나는 딸의 다리를 붙잡았다. 체온은 남아, 살아있을 때와 같았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의료진은 죽은 딸의 처치를 위해 나와 아내에게 잠시 밖에서 대기할 것을 요청했다. 딸을 고운 모습으로 보내야 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호스를 기도에 삽관하고 혈액팩수액을 단 아픈 모습으로 원의 세계로 보낼 수 없었다.


십 여분이 흘러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가 침대에 편히 누워 있는 딸에게로 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딸은 평상시 잘 때와 같은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틀 전 집에서 자던 모습과 같아서, 아이가 살아있다고 착각을 했다. 하지만 그 착각은 그저 1~2초 정도였다.


잡은 딸의 손은 여전히 온기가 있었다. 평상시에 내 턱수염을 만지길 좋아했던 손을 잡아 턱에 대어 문질렀다. 매일 어린이집에 등하원 시킬 때마다 입을 맞춘 딸의 이마에 내 입술을 대었다. 입술에 전해진 온기는 여전히 같았다. 닫힌 눈꺼풀을 열어 동공에 내 얼굴을 보였다. 하늘에서도 아빠 얼굴을 잊지 말라고. 그리고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딸이 아내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불러 준 노래를 들려줬다.


돌배 꽃 꽃잎에 싸여
어느새 잠이 든 낮달
잠 깨워 데려갈 구름 없어
꽃 속에 낮잠을 잔다

꿀벌아 멀리멀리 가거라
선잠 깬 낮달이
울면서 멀리 떠날라

돌배 꽃 꽃잎에 싸여
어느새 잠이 든 낮달
잠 깨워 데려갈 구름 없어
꽃 속에 낮잠을 잔다

-어느 봄날


간호사가 장례 접수를 위한 설명을 했다. 접수처에서 수납을 하고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아 병원 장례식장으로 가 안치실 접수를 해야 한다고 했다.


딸에게 아빠가 잠깐 나갔다 온다고 얘기하고 중환자실을 나갔다. 아이가 평소에 치료를 위해 늘 다니던 병원의 복도인데 그 길을 딸의 떠나는 길을 위해 걸어야 했다. 울음을 참고, 슬픔을 견디며.


낯익은 병원 직원에게 딸의 병원비 수납과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진단서와 영수증을 받아 장례식장에 들어가 아이의 사망진단서를 제출했다. 그저 자녀가 죽었다는 말 외에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접수를 완료하고 아이를 보기 위해 다시 중환자실로 왔다. 들어와서 본 딸의 얼굴은 점점 생기를 잃고 부어올랐고, 잡은 손은 파래지며, 체온을 잃어갔다.


이렇게 아이는 이 세계를 점차 떠나갔고,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어 안치실로 이동을 하기 위해 직원들이 들어왔다.  딸과 함께 이동할 수 있길 부탁했지만 응급실 통로를 지나야 해 규정 상 그럴 수 없음을 알았다. 중환자실을 떠나는 딸이 추울까 봐 이불을 덮어주었다.


딸이 실려 나간 후 아내와 함께 장례식장으로 가, 안치실 앞에서 딸이 오길 기다렸다. 안치실 안에 딸이 도착하자 절차상 신원 확인을 위해 직원은 덮여있던 천을 벗겨 얼굴을 확인시켰다.


딸이었다. 죽은 딸의 얼굴이었다. 오열할 수 밖에 없었다. 심폐소생술 후 복수가 가득 차 입에 피를 머금고 있었다. 아내는 휴지로 입을 정성스레 닦아주며 마지막 돌봄을 하였다.


안치실의 냉장 안치관 앞에 들어가기 전, 딸은 마지막으로 엄마의 손길을 느꼈다. 이제 안치관에 들어가면, 더 이상 나는 딸에게 체온을 나눠줄 수 없는 것이었다. 더 안아 줄 수도, 손을 잡아 줄 수도 없게 되는 것이었다. 죽음은 그런 것이었다. 몸이 식은 아이에게 춥지 말라고 체온을 전해줄 수도, 이불을 덮어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자녀의 죽음이었다.


딸은 안치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더 이상 딸의 부드럽고 따뜻한 몸을 만질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딸을 보냈다.


나와 아내는 장례 절차를 위해 사무실로 들어갔다. 병원에선 어린아이의 경우 가능하면 빈소를 차리지 않길 권한다고 했다. 부모가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하루쯤은 빈소를 차리고 싶었다. 그동안 딸을 사랑한 분들께 딸과 인사를 할 시간을 드리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나와 아내는 아무래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빈소를 차리지 않고 다음 날 발인하기로 했다.


장례식장 직원이 대신해서 딸이 화장될 장소와 시간을 예약하는데, 인터넷으로 접수하는 중 휴대폰 본인인증이 필요했다. 본인 인증으로 위한 숫자를 입력하는데, 죽음까지 숫자를 입력해야 한다는 사실에 허탈했다. 그게 법적 절차임을 알면서도.


휴대폰에 딸의 화장 예약 사항을 알리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읽지 않았다. 알림만 끄려 문자를 열고 이내 닫았다.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나와 아내는 병원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 이상의 접수도, 절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일의 장례를 위해 집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밖에 나와 하늘을 봤다. 유난히 파란 하늘에 뜨거운 햇빛이 있던 정오였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깨끗한 날씨. 딸이 태어났던 그 하늘과 같았다. 딸은 푸른 날에 태어나, 푸른 날에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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