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정돈된 잡담.
안동에는 3개의 양반 가문이 있다는데, 대부분은 반사적으로 '안동 김씨'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그렇지 않다. 의외로 안동의 명망 있는 세 가문은 '의성 김씨', '진성 이씨', '풍산 류씨'라고 한다. 풍산 류씨 중에는 류성룡, 진성 이씨 중에는 퇴계 이황이 유명하다. 의성 김씨 중에는 김시린과 김은경이 있는데 각각 나의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다. (위의 세 성씨 이야기가 바로 이 두 분 피셜이다.)
나의 외할아버지 김시린님은 평생 의성 김씨에 속한 양반 가문의 핏줄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셨다. 그러면서도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이중적인 면도 있으셨는데, 바로 본인의 아버님과 그 또래 세대에 대한 감정이었다.
김시린님의 아버지, 즉 나의 외증조할아버지는 의성 김씨 가문 남정네들 중에서도 명석하고 똑똑한 그룹에 속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그 시대 똑똑한 어른들은 모조리 꼬뮤니스트가 됐다'. 심지어 외증조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이후 가족들을 놔두고 북한으로 넘어가기까지 하셨다. 당연히 남한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은 고달팠을 것이다. 냉전의 공포가 한풀 꺾인 2024년이라고 해도 부모가 자식을 두고 월북한다면 남은 자식들에 대한 온갖 감시와 의심, 냉대와 혐오가 팽배할텐데 말이다. 그 여파로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입이 비뚫어지셨다(-구완와사를 생각하면 된다).
외할아버지는 옆동네(?)인 영양에서 신부를 데려왔는데, 그가 바로 영양 남씨 소속인 남정화님, 나의 외할머니다. 외할머니의 시어머니는 지체 높은 풍산 류씨셔서 그런지 영양 남씨와 그곳 소속인 외할머니를 한 급 아래로 낮춰보셨다고 한다. 자세히는 몰라도 외할머니의 시집살이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외할머니는 어찌저찌 춘천에서 사남매를 낳고 키우시다가 서울 사당역을 지나 마침내 성북구 정릉동에 이르셨다. 사당에서 정릉동으로 이사를 가신 이유는 전적으로 할아버지의 결정 때문이었는데, 할아버지는 본인의 동생들이 살고 있는 성북동, 삼양동과 한 동네인 정릉으로 거처를 옮기고 싶어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이 못내 안타까운 건 첫째, 사당의 집값이 그 이후로 천정부지로 올랐고, 둘째, 정작 정릉동에서도 동생분들과 일년에 제사, 차례를 위한 한두번 정도의 만남 외에는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외할아버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반면에 외할머니는 상대적으로 친근하게 여겼다. 외할아버지는 어릴 적 별 것 아닌 이유로 나를 복날 개잡듯 발로 걷어차고 밟으신 적이 있고, 외할머니는 매번 나 먹으라고 가운데가 뚫린 귀여운 수제 도너츠를 만들어주시곤 했으니 그럴 법 하다. 그렇다고 내가 두분을 굉장히 살갑고 따뜻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두 분 다 나와의 관계에서도 다정하거나 너그럽다기 보다는 계산에 능하고 냉정한 면을 보여주신 적이 많기 때문에 딱히 뜨거운 정은 적은게 사실이다.
계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할아버지가 '마이너스의 손'이셨다면 할머니는 반대로 주식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은 실전 개미셨다. 할아버지가 선비의 삶을 추구하시는 동안, 할머니는 말년까지 주식 평가금을 한때는 6억까지 불리셨던 (에코프로비엠을 아주 예전부터 들고 계셨다고 한다) 나름 성공적인 투자자셨다. 투자자답게 증권사 HTS를 사용하기 위해 컴퓨터를 익히려고 노력하셨고, 텔레비전 채널은 항상 '토마토' 같은 주식 채널에 맞춰두셨다. 내가 놀러 갔을 때는 미국 금리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매크로에도 신경을 쓰셨다.
그러다 오늘 오전 11시 4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영양 남씨 가문에서 괜히 양반 집안에 시집 와서 평생 수많은 제사, 차례를 뒷바라지 하셨던 할머니, 성북구 정릉동까지 오셔서 낯선 땅에 정붙이고 살다가 외할아버지를 먼저 보낸 뒤 많이 외롭고 무서워하셨던 할머니. 80을 훌쩍 넘기신 연세에도 주식을 하시던 신세대 할머니. 언제부턴가 발바닥이 아파서 이동도 힘들어하셨던 할머니. 귀가 어두워져 주변 사람들이 본인을 답답해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셨던 할머니. 생각에 생각을 이어보니 할머니께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일이 많습니다. 이제 뵐 수 도 없는데 미리 찾아뵙고 따뜻한 말씀이라도 드릴 걸,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지만 사랑한다는 흔한 말씀이라도 드릴 걸. 삶보다 느린 후회가 이제야 뒤따라옵니다. 할머니 늦었지만 수고하셨어요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할머니와 나눴던 즐겁고 좋았던 시간들만 기억할게요. 우리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