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육선이 Apr 18. 2024

나쁜 헬스장과 나쁜 트레이너가 빚어낸 난장판

트레이너 노동 4편 중 1편

    여러분은 나쁜 놈과 나쁜 놈이 붙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나는 안다. ‘난장판’이다. 아무리 싸움이라고 해도 UFC 같은 곳은 나름의 퀄리티와 규칙이 있지만, 무규칙 뒷골목 길거리 싸움처럼 눈 찌르고 낭심부터 노리는 난장판도 있다는 것을 청담동의 한 헬스장에서 배웠다. 나의 첫 트레이너 생활이었다.


    운동중독자는 맞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근력 운동에 빠졌다. 하지만 트레이너를 할 생각은 없었다.  운동은 집착의 대상이었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연기를 배우고, 기자 활동을 하고, 교생 실습을 나갔다. 하지만 연기는 술을 너무 마셔서, 기자는 너무 빡세서, 교생은 성격에 안 맞아서 직업으로 삼기를 포기했다. 그 후 잠깐의 생계를 위해 알바로 시작한 게 트레이너였다. 


    20대의 나는 관종이었기 때문에 당분간 트레이너를 할 거라고 소문부터 냈다(SNS에 '대국민임고불출마선언'도 썼다). 그 소식을 들은 아빠가 (내 입부터 막기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서울대 체육교육과 출신 정치인 친구분께 연락을 하셨다. 나는 그분의 소개로 '청담동에서 700평 대형 센터를 운영한다는 스포츠의학 교수님'을 만났다. 


    내 마음은 교수님을 뵙기 전부터 반쯤 충성을 바친 상태였다. 인생을 날로 먹고 싶은 20대 한심이에게 [청담동+교수]의 위력은 막강했다. 첫 만남 자리에서 교수님은 스마트해 보이는 안경을 쓰고 계셨다. 그는 나에게 ‘운동 공부를 시켜주겠다, 선수트레이너로 미국 유학을 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말씀하셨다(약간의 극적 과장은 있다). 만남이 끝나자마자 양재에 있는 큰이모댁에 민폐를 무릅쓰고 하숙을 들어갔다. 출퇴근을 위해서였다. 


    큰이모댁으로 가는 길,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입술이 씰룩거렸다. 알바로 간단히 하려던 트레이너가 이런 귀인을 만나게 해 주다니. “박윤하*! 인생 폈다!” 그때의 나라면 길거리에서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른다.! *내 본명이다


    하지만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처음 보는 청년한테 그런 약속을 하는 어른이 있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드는 걸?!


    아무튼 내 보직은 아침 6시부터 3시까지 일하는 일명 오픈조였다. 급여는 120만 원이었다(수습 때는 60만 원). 그때는 그 급여를 보고도 쎄한 줄 몰랐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이라면 알았을 쎄한 부분은 그 외에도 있었다. 첫째, 7백 평이라던 센터가 실제로는 2백 평 정도였다. 쎄하다. 둘째, 인센티브가 턱 없이 적었다. 수습 후 PT를 시작하면 수업료가 얼마든 내 몫은 5천 원이라고 했다. 쎄하다. 셋째, 4대 보험은 안 좋다고 했다. 3.3%가 당연한 거라고 했다. 쎄하다. (부끄럽지만 스물몇 살 먹도록 이런 걸 몰랐다.)


    - 훗날 홈택스에서 이 시기의 소득을 떼보니 급여 신고는 딱 한 건만 되어 있었다. 3.3%를 떼고도 신고도 안 했던 거다. (불법이겠지) -


    그렇게 고생이 시작됐다. 수습 기간이 끝나자 나에게 여러 건의 PT가 배정됐는데, 그중에는 인근 기획사의 아이돌들도 있었다. 수업료는 사장님이 따로 받았고 나는 1시간에 5천 원의 인센티브만 받았다. 6시간을 수업해도 인센티브는 3만 원이었다. 보통 한 시간 수업료가 5만 원이면 평균적인 트레이너는 40~50%를 가져간다. 물론 내가 초보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랬다면 수업료가 낮아야 했다. 그리고 경력에 따라 인센티브도 인상해야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초라하더라도 경력이라는 게 쌓이다 보니, 내 조건이 압도적으로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됐다. 불만도 싹텄다. 그래서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사장님과의 대화는 번번이 얼버무리듯 끝날뿐이었다. 오히려 사장님은 ‘서울대 대학원에 꽂아주겠다, NATA라는 미국 선수트레이너 과정을 나와 함께 노려보자’는 달콤한 공약을 제시하곤 하셨다. 난 그럴 때마다 거기에 휘둘렸다. (당연히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 웃음)


    심지어 24시간 근무 겸 숙식도 했다. 어쩌다 그랬느냐고? 일이 익숙해지면서 나에게 저녁 수업을 받고 싶다는 사람들이 생겼다. 마침 날씨가 추워서 자전거 출퇴근도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사장님께 잘 보이고 싶었다!(나를 서울대에 보내주고, 미국 유학을 리드해 주고, 공부도 가이드해 줄 분이었으니까) 그래서 사장님께 센터에서 자면서 일해도 되냐고 여쭤봤다. 허락까지 1초 정도 걸렸다. 


    사실 내 계획은 오후 3시에 원래대로 퇴근해서 바깥에 있다가 저녁 수업 때만 오는 거였다. (나도 그렇게 까지 순진하진 않았다.) 그러나 내가 24시간 근무자로 인식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웃음)


    시간은 또 흘렀다. 예상 밖의 24시간 근무, 남들이 시간당 3~5만 원을 받을 때 나만 5천 원을 받는 생활, 지켜지지 않는 약속 등은 꾸준히 이어졌다. 급여는 많아야 이백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 생활을 지속했던 이유는 팀장님 두 분과 운동하는 것이 즐거웠고, 사장님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고, 모든 걸 처음 배우는 과정이 설렜기 때문이다. 아직 배울 게 많다는 건 분명했고 나는 그럴 의지가 있었다. 


    좋은 추억도 있다. 당시 팀장님 두 분은 밤 12시에 마감을 하고 셔터를 내린 뒤 나와 3시까지 운동을 하고 근처 호텔에서 '전복 해물 라면'을 사주기도 했다. 사우나도 했다. 비록 나만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오픈을 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 시간은 오히려 힐링이 되었다. Essentials of Strength Training and Conditioning 이라는 책을 공부하라는 사장님 말씀을 듣고 반년 넘게 그 책만 세 번을 봐도 즐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꼬여갔다. 사장님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커졌고 그 불만을 다른 즐거움으로 간신히 틀어막았다. 그 무렵 내가 흔들린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돈'이었다. 청담동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에서(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동네를 거닐면서 나만의 환상과 오해, 망상을 키워갔다. 주변에 대단한 부자들만 있는 것 같았고 나만 바보, 실패자인 것 같았다. 가치관이 말랑말랑하고 그릇이 작았던 나는 그곳에서의 경험들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얼마 후 인생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다. 차라리 순진한 피해자로 남았으면 떳떳하기라도 했을 텐데, 나까지 나쁜 놈이 되어버렸다. 첫 사회생활도 난장판이 됐다.


- To be continue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