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인 이야기
운동을 좋아해서 트레이너가 되려고 한 흔한 사람이 여기 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고 취업 경험은 없다. 사회인들 눈에는 영락없는 '핏덩이'다.
아들을 돕고 싶었던 아빠는 후배에게 전화를 한다.
"어 민수니? 우리 아들 육선이 기억하지? 어릴 때부터 운동을 그렇게 좋아했잖냐. 근데 트레이너를 한 번 해보겠다네?"
민수 아저씨(가명)는 명문대 체육교육과를 나와서 나랏밥을 먹으며 체육 관련 일을 하는 분이었다. 그분이 아빠나 나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을 한 명 소개해줬다.
그는 대한민국의 넘버 원 부촌인 청담동에서 700평짜리 헬스장을 운영하는 사장이었다. 동시에 의과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학에서 스포츠의학을 가르치는 교수기도 했다. 그를 만나러 갔다. 청담동으로 갔다.
사장님을 보기 전부터 상태가 이상했다. 청담동이라는 네임 밸류에 주눅이 들었던 게 분명하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다 재벌 같았고 그들에 비해 내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나는 중산층보다는 서민에 좀 더 가까웠을 거다. 그때 부모님의 월소득이 (세전) 300~400만원 정도였으니까.
그날 의외로 군침 도는 제안을 받았다. 사장님 말인즉,
1) 트레이너 중에는 머리 좋은 애가 없다. 근데 너는 머리가 좋다. (내가 졸업한 대학교 때문에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신 듯했다. 굳이 진실을 말씀드리진 않았다.)
2) 키워줄 만한 머리 좋은 제자를 찾고 있었다. (나를 설레게 한 발언.)
3) 월급도 주면서 공부도 시켜주겠다.
4) 한국은 다 별로고, 미국에 NATA라는 자격증이 있다. 그걸 따서 미국에서 잡(JOB)을 구한 뒤에 사오십대가 되면 한국에 와서 교수를 하면 된다.
는 것이었다.
여러분이라면 아래 셋 중 어떤 반응이었을 것 같나?
1) 이건 기회다, 사장님에게 충성하자.
2) 아직 신중해야 한다, 천천히 지켜보자.
3) 사기꾼이네.
다들 하나씩 선택해 주길 바란다. (그래야 이입이 된다.)
나는 1번이었다. 원래 사람을 잘 믿는다. 게다가 내용이 매력적이고 나의 욕구까지 자극한다면 더 잘 믿게 된다. 사람을 잘 믿는 게 아니라 유혹에 약한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일단 넘어가자.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졌을 것이다. (제발 그래줘.)
사장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뒷이야기를 지루하게 설명하기보단 몇 가지 상징적인 장면을 추려서 보여드리려고 한다.
장면 1.
주변 트레이너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그들은 격양된 목소리, 찡그린 표정으로 나에게 충고하고 있다.
"너 그렇게 받으면 안 돼", "다른 데 가서 이렇게 일하면 월 1000 은 벌겠다", "여기서 먹고 자면서 월 200 벌면 어떡하냐?"
장면 2.
조심스레 사장실 문을 두드린다. 조용히 들어가서 사장님께 여쭤본다. "사장님 그때 말씀하신 스터디는 언제 시작할 수 있나요?" 사장님은 대답한다. "일단 보라고 한 책 세 번 정독하고 오면 다시 얘기하자." 나는 문을 닫고 나가며 속으로 중얼댄다. '세 번 봤다고 저번에 말씀드렸는데...'
장면 3.
사장님이 말한다. "급여는 3.3% 떼고 주는 거야." 내가 대답한다. "네!"
사장님이 또 말한다. "기본급은 8시간 근무에 100만원이야. 피티 수업 한 번 할 때마다 3천원씩 인센티브 줄게."(수업 한 번에 2~3만원이 평균이었다) 나는 또 우렁차게 대답한다. "네!"
장면 4.
몇 년이 지나고 홈택스에서 소득증명을 뗐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내 연봉은 200만원이었다(월급 아님). 공식적으로 나는 그 회사에서 딱 한번 급여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1년 열두 번 중 열한 번의 급여는 신고가 안 되어 있었다. (매번 떼간 3.3%는 어디에?)
이 외에도 장면이 몇 개 더 있지만 적고 나서 지웠다. 비슷한 레퍼토리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저 사장님은 피트니스 업계의 유명한 악마 중 한 명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흔하디 흔한 사장 유형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도 고학력 교수 사장이라는 점은 유니크하긴 하다.) 지금도 피트니스 업계에서는 유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전보다 조금 나아졌다고는 해도 새발의 피 수준이다.
한국에는 노동법이 있지만 피트니스 업계에는 그것을 능가하는 몇 가지 불문율이 있다.
1) 대부분의 트레이너는 프리랜서로 고용된다. 하지만 지시를 받으며 일한다. 프리랜서로 인정받으려면 업무 지시가 없어야 한다.
2) 프리랜서라면서 기본급은 준다. 하지만 최저시급을 지켜서 기본급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8시간 근무에 기본급 120만원이라는 식이다.
3) 직원이 자신을 프리랜서라고 생각하도록 가스라이팅한다. 사장 입장에서 고용된 근로자에게는 퇴직금, 연차수당 등 '비용'이 더 들어가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트레이너들은 프리랜서가 아닌 근로자의 형태로 일한다.
이런 불문율에 어긋나는 노동법을 좋아하는 사장은 거의 없다. 불문율과 달리 노동법은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이익에 도움 되는 면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근로자를 편드는 좌파 정책'이라며 욕을 하는 사람도 봤다.
그 욕이 반은 맞았다. '근로자를 편든다'는 말은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듯 맞는 말이었다. 노동법은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법이다.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근로자가 사용자에 비해 약자라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런 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노동법이다. 노동법이 사장 편을 든다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고 켜켜이 쌓여온 법체계를 흔드는 일이다.
실제로 많은 트레이너들, 특히 과거의 나처럼 사회초년생에 해당하는 트레이너들이 노동법을 몰라서 피해를 입는다. 업무 지시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프리랜서라고 생각하고, 고정된 기본급을 받으면서도 프리랜서니까 퇴직금을 받을 수 없다고 알고 있고, 연차는 사무직 직장인에게나 있는 거라고 알고 있고, 근로계약서를 안 쓰고 얼레벌레 넘어가는 사장에게 정당한 요구를 하지 못해서 나중에 후회를 한다.
내가 겪은 일들도 8~9년이 지난 지금은 추억이 됐지만 근력학교를 만들 당시에는 기억이 꽤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차마 선하고 착한 회사는 못 되더라도 법에 적힌 기본은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만든 게 최저시급을 준수하는 기본급, 지점의 순이익을 회사와 근로자가 합의한 비율대로 나누자는 문서화된 약속, 근로자 입장에서 매달 예측 가능하도록 체계화된 급여 체계라는 기본 시스템이었다.
여기서 반의 반발짝만 더 나가서 내부 구성원들에게 회계 자료를 투명하게 공개하려고 했다. 직원으로 일할 때 회사가 얼마를 벌고 얼마를 써서 얼마가 남는지, 나는 그중에서 얼마를 받는지 알려주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직원 입장에서 이런 정보를 전혀 공유받지 않는다면 회사에 소속감을 느끼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게 정답이고 올바른 방식이니 다들 따라 해야 한다는 헛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와 목적을 공유하려는 것이다.)
7년 차에 접어든 지금, 나는 과거의 결정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절반은 자랑스럽다. 피트니스 업계에서 흔치 않게 투명하고 공정하다고 자부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반은 부끄러움이다. 기본만 지켜도 자랑할 수 있는 게 피트니스 업계의 수준이라는 게 부끄럽다.
사람은 어디에 속해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똥밭이면 세수만 해도 깨끗한 사람이 되고, 꽃밭에 서 있으면 조금만 꾀죄죄해도 부끄럽다. 그래서 나는 피트니스 업계 전체가 꽃밭에 가까워지길 바란다. 왜곡된 고용 관계, 비뚤어진 노사 관계가 없는 업계로 상향평준화가 된다면 세상이 우리를 보는 눈부터 달라질 거다. 그러면 트레이너도 사장도 다 같이 직업적으로 더 인정받을 수 있을 거다. ('트레이너 중에 양아치가 많다'는 말이 여전히 흔하다.) 그리고 확신컨대 트레이너들의 전문성도 높아질 것이다. 헬스 좀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씩 찝적거릴 수 있는 쉬운 직업이 아니라 오랫동안 공부하고 훈련해야 할 수 있는 - 그만큼 정상적인 대우를 받는 - 직업으로 변하게 될 거다. 현재 일부 사장들은 트레이너 수준이 낮기 때문에 급여도 이상하게 주는 거라고 합리화하지만, 반대로 정확하게 계약하고 정해진 급여를 제공한다면 수준이 낮은 트레이너들이 걸러질 거다.
피트니스 업계는 갈 길이 멀지만 과거에 비해 나아지고 있는 부분도 있다. 예전보다 많은 트레이너들이 노동법을 알고, 필요할 때 활용한다.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은 당연히 있지만, 편법을 100% 막을 수 있는 법은 노동법 외에도 없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면 안 되듯이 소수의 악용 사례를 근거로 근로자 보호를 멈춰서도 안 된다.
사장들은 돈이 더 들더라도 그만큼 더 좋은 직원을 뽑기 위한 고민을 하면 된다. 인사 담당자로서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회계 담당자로서 급여를 정하는 기준을 정하고, 경영자로서 운영하고 경영하는 방식에 대한 기준을 만들면 된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기준이 발전할수록 회사에는 더 마음 맞고 훌륭한 직원들이 남게 될 거다.
글을 마무리하려다 보니 실컷 아는 척하며 떠들어댔지만 사실은 나부터 잘해야 하는 내 처지를 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7년 전 열정 넘치던 나와 잔뜩 지치고 움츠러든 지금의 내가 비교가 된다. 앗... 순간 감상에 빠져서 A4 한 장 분량의 신세 한탄을 쏟아놓을 뻔했다. (큰일 날 뻔...) 모쪼록 동료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 좋았던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정신이나 똑바로 차려야겠다. (너무 어려운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