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사는 이야기
이번에는 영국와 미국에서 만났던 북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 조금 더 정확히 특정지어 남한땅에서 살다보면 북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흔치 않다. 언론에서는 대부분 탈북인들의 밝은 모습을 비춰준다. 최근에는 그나마 유튜브에서 탈북인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북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북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적다. 사실 한국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북한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유명한 메인포털 뉴스에 댓글만 봐도 빨갱이라는 말이 쇄도하고 있다. 물론 최근에는 그 대항마로 친일파를 비꼬는 말인 '토착왜구'라는 말도 생겼다. 이렇게 모 아니면 도 방식으로 키워드를 정하고 상대방을 비난한다. 정치인들의 의식이 영글지 못한 탓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직 북한은 한국에서 거리낌없이 다루기에는 껄끄러운 주제이다.
나에게 처음 북한사람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려보라면 금강산관광일 것이다. 정주영 회장이 현대 서산목장에서 키운 1001마리의 소 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는 방송을 본 기억이 난다. 이 일을 계기로 이산가족상봉과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남북관계의 얽힌 실타리가 풀릴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더 시기였다. 그 당시에는 내가 수의사가 될 줄은 몰랐다. 초딩때 나의꿈은 자동차 엔지니어였다.
지금에 와서 직업병이 돋아서 그때 북한에 갔던 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찾아보았다. 당연히도 관련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단지 소떼를 싣고 간 트럭 100대는 아직도 북한에서 굴러다니고 있다는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소들은 아마 최대한 빨리 도축한 뒤에 노동당의 고위 계층 간부들이 섭취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북한에는 전염병들, 예컨대 우결핵이나 구제역, 인플루엔자 같은 질병들을 비롯해 사람과 동물이 같이 병에 걸리는 인수공통전염병들이 산재해있다가 매년 창궐하기 때문에 일을 시키기 위한 사역용 동물이 아닌 이상 오래 키우지 않는다. 최근에 한국에서 이슈가 되었던 아프리카 돼지 열병도 북한에서 내려온 멧돼지가 퍼뜨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 않은가. 축산뿐만이 아니라 개들도 반려견으로 키우다가도 5년 이상이 되면 덩치와 상관없이 -그래서 대형견이 많다고 한다- 식용으로 섭취한다. 고양이는 애초에 반려동물이라는 생각도 거의 하지 않고 나비탕이라는 명목으로 잡아먹기 때문에 다른나라처럼 길냥이를 보기도 힘들다고 한다.
내가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온다면 약자, 특히 동물에 대한 권리는 나중 일인 것이다.
그 후 현대아산이 금강산 관광을 시작했다. 처음 몇 년동안 육로 관광은 없었다. 동해에서 크루즈선을 타고 배에서 하룻밤을 자면 금강산을 도착한다. 그리고 3박 4일을 지내고 다시 배로 남한으로 복귀하는 해상 관광이 주된 이동경로 였다. 나는 봉래호라는 배를 탔었는데. 크루즈선이다보니 밤에 공연을 보면서 갔다. 러시아 여자 댄서들이 전통춤인 캉캉을 추면서 계속 치마를 뒤집어서 팬티를 보여주었는데 참 야하다는 생각을 했고 눈둘 곳을 몰랐다. 혼혈로 알려져있는 가수 박일준 아저씨도 옆자리에 앉아 있어서 같이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금강산에 도착하기 전 남한 가이드는 북한에서 어떠한 정치적인 말도 꺼내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다. 북한 안내원들이 친절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사상 검증 훈련을 마친 사람들이기 때문에 북한에 억류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엉덩이 털나고 뿔 달린 도깨비를 묘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광내내 괜히 트집 잡힐까봐 북한 사람들에게 무서워서 말은 걸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았고 외모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얼핏 보았다. 가을에 풍악산이라고 불리는 금강산 경치는 예뻤지만 솔직히 강원도에 있는 설악산이나 오대산과 별 차이는 없어 보였다. 희소성이 그 아름다움을 더 과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쉽게도 금강산은 이제 갈 수 없으니 좋은 경험으로 가지고 있다. 봉래호는 카지노선으로 변해서 홍콩 앞바다에 떠 있다고 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했을 당시만 해도 교련과목을 배웠다. 70~80년대처럼 교련복을 입고 제식훈련을 한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1시간씩 반공교육을 받았다. 북한군이 저지른 만행이라는 비디오를 계속 틀어주었는데 굉장히 잔인한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눈쌀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였다. 하지만 나중에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더 잔인하게 현지인들을 대했다는 자료를 접하면서 고등학교때 보았던 자료는 북한군의 잔인함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집단적인 최면으로 벌이는 광기에 가깝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년을 올라가면서 7차 교육과정으로 개편이 되고나서 교련 과목은 사라졌다. 기존에 남아있던 군사교육의 잔재를 점차 지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내가 다녔던 곳은 사립학교이다보니 마음대로 선생님을 자를 수 없어 교련선생님은 도덕선생님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그 선생님은 은퇴하시기 전까지도 반공 교육에 매진하셨다고 하고 말을하기 힘들때마다는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틀어주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군대에서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그 끝에 다다른다. 내가 젊은 나이에 여기서 왜 개고생을 하는 것인가? 춥고 졸리고 배고픈 곳이 군대이다. 자유를 박탈해간 징집제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북한으로 향한다. 그것이 고위 노동당 계층인지, 옥수수죽을 먹으면서 굶어죽는 일반인인지에 대한 구별은 상관이 없다. 훈련소부터 전역 전까지 끊임없이 북한의 특수부대와 재래식 무기에 대한 위력, 화전양면전술과 같은 무시무시한 전략을 설명하면서 반공교율을 실시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심지어 이런 교육을 담당하는 병사였기 때문에 다른 병사들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는 했었다. 이런 방식으로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각인이 생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막연하게 끝날뻔했던 북한에 고정관념은 영국에서 변곡점을 그리게 되었다.
2015년, 나는 영국의 버밍햄이라는 도시에 살면서 반려동물병원에서 조금씩 일을 도와주고,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를 가지고 멋진 도서관을 가진 도시였다. 더운 여름날, 동물병원에 누가봐도 한국사람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가 방문했다. 이름은 Y였다. 백인 남편과 함께 막 1살이 된 흰색 셀커크릭스 고양이의 백신을 접종하기 위해서 였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혹시나 물어봤더니 역시나. 김치는 김치를 알아보는 법이다. 해외에서 애국심이 더 불탄다고 반가워하면서 연락처를 교환했다. 몇일 뒤, 운하 옆에 있는 수제버거 식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나보다 몇살 누나였는데 한국에서 루마니아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루마니아로 와서 의대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이 영국에 직장을 구하는 바람에 같이 영국으로 이사를 왔고, 의사로 일을하고 있다고 했다. EU국가에서 획득한 면허가 있으면 간단한 시험만 쳐도 같은 EU국가내에서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부부와 몇번 왕래를 했는데 꽤 죽이 잘 맞아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어느날, Y는 자기가 일하는 종합병원에 와서 봉사활동을 해보라는 제안을 했다. 나로써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흔쾌히 허락하고 몇일 뒤 병원을 찾아갔다. 버밍엄 시청과 경찰서 바로 옆에 있는 병원은 담쟁이 넝쿨이 온 벽을 둘러싼 고풍스러운 빅토리아 풍의 4층 벽돌 건물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100년도 넘은 건물이다보니 실내가 어둡고, 복도는 스산했다. Y 누나와 사회복지사가 1층 메인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 병원시설을 소개해주었는데 점차 어둠에 눈이 적응되고나니 생각보다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아 쾌적했고, 교과서에서 나올법한 시설을 모두 갖춘 상태로 잘 활용하고 있었기에 기본에 충실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1층 제일 구석진 방문 앞이었다. 페인트칠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연노랑색의 페인트 냄새가 살짝 코끝을 찔렀다. 밖에서 보면 그냥 창고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문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 안에는 의외로 큰 수영장이 나왔다. 가로세로 크기는 20m정도로 꽤 커보였다. 뭐야, 이거 빼도박도 못하고 수영장 청소 각인가??
사회복지사는 강한 브루미 억양 (버밍햄 지방의 사투리로 영국내에서도 최악의 발음으로 악명 높다)으로 오늘 할일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다행히 수영장 청소는 아니었다. 내가 해야할 임무는 한 동양인 모녀의 재활치료를 돕는 일이었다. 눈을 돌리니 반대쪽 락커쪽에 동양인 모녀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모녀에게 첫 인사를 건네기 위해 다가갔는데 얼핏 듣기에도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어 선택이 조금 이상했다. 억양도 특이했다. 내가 대학교때 감자밥좀 먹어봐서 아는데 강원도 사투리는 아니었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북한 사람 같기에 다시 Y에게 돌아와서 물어보니 내 촉이 맞았다. 북한 에서 온 모녀였다. 엄마는 광대가 도드라져서 조금 억세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몸은 건강해보였는데 딸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초등학생 정도인것 같은데 온몸에 근육이 하나도 없고 뼈만 앙상했다. 혼자서 걷는 것은 불가능했다. 팔을 잡아주다가 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엄마가 아이의 옷을 수영복으로 갈아입혔다. 그 다음, 엄마와 내가 각각 수영복을 입었다. 그리고 아이를 부축한채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엄마를 도와 교대로 아이가 물에서 걷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팔 양쪽에 부표를 매달았기 때문에 갑자기 물에 빠지거나 가라앉을 일은 없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는 엄마의 구령에 맞춰 한걸음 한걸음을 옮겼다. 매 걸음걸이가 무척 고통스러워보였다. 하지만 물 밖에서보다는 물 안에서 몸을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어서인지 아이의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괜히 나도 옆에서 신나, 응원을 하면서 성심성의껏 도와주었다. 참고로 북한 사람들은 화이팅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쉬는시간 15분을 포함해서 2시간 정도를 물속에 있었던 것 같다. 아이는 끝나고 나서 녹초가 되었는지 물 밖으로 나와서 한동안 누워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활치료가 끝나고 나니 엄마는 나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것 같았다. 내가 좀 열심히 도와주긴 했지. 뒷 정리를 하고 나서 앉아서 대화를 할 시간이 생겨서 몇가지를 물어보았다. 듣고보니 그 모녀도 참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평양에 살던 여자-엄마-는 고등중학교 (한국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한다. 남편이 어떤사람인지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책임감이 하나도 없는 최악의 아빠임은 틀림없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아이를 가졌고 출산을 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아이가 점차 자라면서 체구가 또래에 비해 훨씬 왜소했다. 몇군데 병원을 찾아다니고 나서야 유전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몸에 근육이 붙지않고 계속 손실이 일어나는 근위축증이었다. 북한에서는 치료할 수 있는 시설이 부족했다. 설령 가장 좋은 병원을 가더라도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의사로부터 아이의 치료를 포기하라는 말도 들었다. 아빠는 책임감에 대한 회피와 생활고에 지쳤는지 야반도주를 선택했다. 북한땅에서 사라졌는지, 중국땅으로 사라졌는지 알길이 없다고 했다. 책임감 없이 정자만 기증한 아빠와 달리, 딸을 포기할 수 없었던 엄마는 갖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의학기술이 발달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국이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을 했다.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몇개월에 걸쳐 준비를 하고 드디어 서울땅을 밟았다. 이때만 해도 딸의 병을 치료하고 오손도손 살아가는 행복한 가정을 꿈꿨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생활 정착과정에서 모녀가 경험한것은 차별의 연속 뿐이었다. 장애인이어서 겪는 차별, 말이 달라서 겪는 차별, 돈이 없어서 겪는 차별. 모녀는 개의치 않고 한국에서 근위축증유전병 치료로 가장 유명한 H병원을 찾았다. 길고 긴 상담 끝에 나온 결론은 2가지 였다. 유전병이기 때문에 치료될지 아닐지는 의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치료비용이 어림잡아 최소 2억정도 들어간다고 했다. 돈이 문제인가, 치료할 수 있다면 내 몸을 갈아서라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1년동안은 닥치는대로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딸 치료에만 전념 했다. 하지만 병과 가난은 희망보다 끈질긴 법이다. 딸의 병에는 큰 차도가 없었고 돈은 아무리 벌어도 모이지가 않았다. 한국에 머무르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찾아왔다. 여기까지인가, 운명을 포기하려던 찰나, 하나의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영국은 정부에서 NIH라는 의료시스템을 운영하면서 의료서비스를 100% 무료로 운영한다는 말이었다. 더욱 혹하는 말은 난치병을 가진 사람들의 치료도 거의 무료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거다 싶었다. 영국으로 가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찾아보았는데 영국이 전세계에 있는 나라 중, 북한의 탈북민들의 난민 신청을 가장 많이 받아들여주는 나라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2015년 영국에 난민으로 간 북한 사람의 숫자는 대략 700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주저없이 영국으로 난민 신청을 했다. 한국에서 일상이 습관으로 배일 무렵인 1년 뒤, 난민 신청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는 사람 한명 없는 낯선 나라에 덜컥 두려움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삶의 무게에 짓눌려 버린 모녀에게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사치였으리라.
낯선 영국 땅에 처음 도착하고, 영국의 의료시스템인 NIH에 등록을 했다. 사회복지사를 만나고, 주치의를 배정받은 뒤 상담을 하고 첫 치료를 받던 날 엄마는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한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영국에서 치료를 시작한지는 1년 반이 되었다고 한다. 적절한 영양섭취와 재활치료로 딸의 상태는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 모녀에에게 두발로 평범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얼마나 부러울까. 고맙다는 말과 함꼐 그날의 일정은 끝이났다. 그 이후로도 3번 정도 병원에 더 나와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도와주다가 내가 영국의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는 바람에 인연은 끊기게 되었다. 5년이 지난 지금, 딸은 상태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졌을까. 친구들과 같이 밖에서 놀다가 늦게 들어온 딸에게 엄마가 잔소리를 하는 행복한 모습을 잠깐 그려본다.
나는 지금껏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 전체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현 북한체제를 옹호하고 우리와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을것이란 고정관념이었다. 물론 소수의 북한사람은 부와 명예를 위해 비인륜적인 짓을 서슴치 않는 것은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다를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나와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동물병원에서 만난 다른 북한 사람으로 인해 더 이상 국적이 한 사람을 규정하는데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김씨 삼부자를 끔찍히도 싫어하는 북한 여자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