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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착한 레몬 May 16. 2022

차곡차곡_글1

*차곡차곡은 양혜리작가와 내가 함께 쓰는 글이다.

1.

새해가 되고 달력이 몇 장 넘어가는 동안 친하게 지내던 작가들이 하나 둘 작업을 그만둘지도 모르겠다는 근황을 전해왔다. 큐레이터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친구 몇 명과 스터디를 만들었던 그 해로부터 꼬박 12년이라는 시간도 지났다. 소위 예술계라 불리는 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료들이라고, 친구들이라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불러 주어야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결코 혼자일 수 없는 존재라고 믿었던 순간들이 조금씩 옅어져서 이제는 바래져가는 것만 같았다. 조금씩 날아가고 있었다.

*아, ‘예술이란 결국 혼자 하는 일’이라는 말도 들었다. 마음이 시큰하고 서러움이 밀려왔다.


2.

그 많던 작가들과 그 많던 큐레이터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의 패기와 열정, 즉흥적이었지만 손과 마음을 모았던 그 많은 도모의 순간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싸우고, 또 주변과 싸우고, 무엇보다 동료들과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이라는(그래서 이 직업의 피로도는 다른 직업과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일종의 가설을 듣고는 이전에 내가 느끼지 못했던 피로들까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 일을 그만두지 않는가?


3.

문득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마르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푸릇푸릇한 잎사귀들이 많이도 올라왔고, 그것을 바라보다보니 어느새 창밖의 풍경들은 바뀌어 있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나가서 좀 걸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으면서 보니 바람의 냄새가 달았다. 공기가 과실 같다는 말이 떠올랐다.

계절은 잘도 지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언제나 그렇듯이),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빠르게 변하는 것만 같아서 얄미롭고, 미웠다. 걷는 동안 자주 멈칫하고, 망설이고, 불안한 마음이 일렁일 때면 바람 속에 들어있는 꽃냄새를 쫓으려고 자꾸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숨을 들이 마시고, 걸음을 멈춰 눈앞에 나무들을 바라보니, 계절은 어느덧 여름의 문 턱 이었다.


4.

그동안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아주 많은 것을 했지만,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가설이, 이야기가, 세계를 만드는 일이 쉽게 이루어진다면, 인생이 너무 시시해 질 것만 같아서, 역으로 이 일은 오래도록 실패해야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일이구나 하고 ‘나는 무언가를 공들여 해왔고, 하고 있으나, 아직은 아무것도 이루어 지지 않았다.’ 라고 고쳐 쓰고, 이 문장을 여러 번 읽어 보았다. 그리고 이내 되새겼다.

*언젠가는 이것들이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갖게  것이다.


5.

찰스 부코스키의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이라는 책에서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는 책을 펼치기도 전에 실패와 좌절감을 안겨줌으로 인해 앞으로 내가 겪게 될 수많은 실패의 출발점이 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시작을 음미하고 싶진 않았고, 그때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이 책은 펼쳐지는 대신 고운 상태로 책장에 꽂혀야만 하고, 나는 그것을 자주 바라볼 것이다. 책은 책장을 지나칠 때마다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있으면 좋을 것 같다.


6.

책은 책을 불렀다. ‘위대한 작가‘의 무게감에 짓눌린 나는 잠깐이지만 선명한 실패를 맛보았고, 이내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7.

종착지는 안규철 작가의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큰 안도감을, ‘모든 것’에서는 역시 짙은 좌절감의 냄새를 맡았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좌절하고, 속상해 하고 무너지겠지. 하지만 실은 그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작은 용기를 갖게 되겠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책을 읽어 나갔다. 책의 표지에는 ‘모든 것과 (AND) 아무것도 아닌 것’ 이 아닌 ‘모든 것, 그러나 (BUT) 아무것도 아닌 것’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BUT)’ 라는 이음말을 쓰기 전에 그 자리를 대신했던 ‘그리고(AND)’가 밑줄로 그어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8.

‘어떤 물체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추락하는 것은 중력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유리컵들이 저마다 다른 높이의 소리를 갖고 있는 것도, 스웨터의 실을 풀면 다시 새로 스웨터를 짤 수 있다는 것도, 거울들에 반사된 빛을 모아서 벽에 둥근 달의 모양을 그릴 수 있다는 것도, 공들이 저마다 다른 높이로 튀어 오른다는 것도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들은 극적인 사건이나 어떤 조형적인 절정의 순간을 추구하지 않는다. 각자의 위치에서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며(견뎌내며) 주어진 일을 반복적으로 수행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극적인 사건들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세상과, 세상보다 더 극적인 사건들로 채워지곤 하는 미술관들의 드라마, 이벤트는 여기에 없다. 그러면 대체 이것들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 있는가. 이들은 무슨 일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일의 결과가 제로가 되는 것, 헛수고, 공회전,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하는 것,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 실패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 실패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 그리하여 그 실패의 과정에 투여된 노동과 시간이 온전히 그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들의 일이다. 그럼으로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 또는 우리가 이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하는데도 왜 삶은 변하지 않는가, 우리가 얻었던 것들은 어째서 잘못 배달된 선물처럼 되돌려주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하려는 것이다.’


- 안규철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6-7p


9.

나는 위의 문단을 정독하고, 곱씹고, 소리 내어 읽고, 마침내는 필사하면서 그 뒤를 따라간다. 양혜리 작가와 내가 앞으로 나누게 될 이야기들은 작업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로서 살아가는 이야기, 큐레이터로서 살아가는 이야기. 이 이야기들은 실패를 그리는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언제나 누락된 것을 살피고, 주변을 살피고, 중심보다는 바깥에 서 있는 사람들이기에 실패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삶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우리는 결국 실패할까, 아니면 성공할까.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를 견디고 행동을 이어나가는 견디는 사람들이라는 것, 우리에게 실패란 우울, 좌절, 절망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모든 것으로 옮겨는 발걸음의 끝이 결코 0은 아닐 것이다.

*아니, 0일리 없다.


- 한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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