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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착한 레몬 Oct 04. 2022

차곡차곡_글7

*차곡차곡은 양혜리작가와 내가 함께 쓰는 글이다

고등학교 입시로 치열했던 중학교 3학년 어느 여름 방학. 길고 긴 낮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버렸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 다니고 싶은 고등학교는 지역 명칭이었기 때문에 이름이 같았고 나란히 붙어 있었다. 같은 이름에 비해 두 학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 학교는 애들을 때렸고 저 학교는 안 때렸다. 이 학교는 두 발 규정이 귀밑 3cm인데 저 학교는 매직 스트레이트 한 언니들이 세련된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다녔다. 이 학교 교복은 우중충한 초록색 마이에 벌건 줄이 그어진 체크무늬 치마였는데 저 학교 교복은 위아래가 모두 짙은 남색이고 넓은 칼라 끝이 흰 줄로 장식된 단정한 세라복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교복이 이 동네에서 가장 스타일이 좋다고 칭찬했다. 내 눈에도 예쁜 스타일이었다. 


담장을 하나 사이에 놓고 나는 저기로 가기 위해 이 방학에, 이 여름에 이러고 있구나 생각하며 도서관 바닥에 누워버렸다. 누워서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렸다. 새로운 각도로 보니 낯선 광경이 재미있었다. 도서관 책상 발판마다 모두 비어있었는데 어느 발판에 만화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당시 만화책은 절대 보아서는 안 되는 불온서적처럼 대하는 학교와 집안의 분위기가 있었는데 저 학교에 다니는 언니들이 보는 만화책이라면 괜찮지 않은가? 정당화했다. 만화책의 이름은 '윙크'였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재미있었다.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몰래 읽는 긴장감까지 더해져 박진감 넘쳤다. 이어지던 흑백 페이지가 갑자기 컬러풀한 흰 배경의 세상으로 환해졌다. 긴 손가락을 가진 손으로 한쪽 눈을 가린 나머지 한쪽 눈은 반짝반짝 빛나는 미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야심 새 연재!!!▶▶▶

 Hotel 아프리카

 꿈을 찾는 사람들의 물빛 이야기


그리고 컬러풀한 만화는 옛날식 캠코더로 뭔가 영화를 찍는 상황이었고 셋은 친구인 것 같았다. 어떤 이야기인지 몰라도 그림이 너무 예뻐서 나는 다음 회차의 윙크를 찾았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는 일명 '뽀리'는 이벤트가 많았는데 여럿의 아이들이 문방구에 동시에 들어가 주인아저씨가 정신없는 틈에 잡히는 대로 뭐든 하나씩 집어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어 그냥 지켜만 보던 입장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그럼 나도 같이 할까? 했더니 친구들이 아니야 너는 진짜 그러지 마 말렸다. 당시의 친구들은 내가 너무나 착하고 거짓말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원이라는 친구는 내 등을 살피며 숨겨진 천사의 날개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순진했던 성격을 좋게 봐준 것이겠지.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실제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너무 죄책감이 없어서 약간 사이코패스 같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남의 만화책을 펼쳐놓고 읽다가 일어나 유유히 필통을 열어 커터 칼을 꺼내 행여나 만화가 어디 상할까 조심하며 호텔 아프리카 1편 컬러풀한 딱 그 부분을 훔쳤다. 그 뒤로 용돈을 모아 음악 테이프와 만화책을 사는 기쁨으로 살았던 것 같다. 당시 잘 모셔온 종이는 지금은 조금 누레졌지만 여전히 내 책장 클리어 파일에 잘 보관되어 있다.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의 진학은 성공했다. 예쁘고 우아한 선배들이 전교에 가득했고 때리는 선생도 없었으며 나도 그 세라복을 입는 데 성공했다. 나는 진지하게 엄마에게 말했다. 미대에 가고 싶다고. 엄마는 우리 집 형편에 미술학원 보내주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 양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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