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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착한 레몬 Oct 04. 2022

차곡차곡_글7

*차곡차곡은 양혜리작가와 내가 함께 쓰는 글이다

1. 한 동안 서울의 전체를 들뜨게 했던 프리즈가 끝났다. 프리즈, 키아프라는 이름을 동시에 걸고 진행되었지만, 애초부터 층을 다르게 두고 시작했던 두 페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프리즈 서울의 대성공을 맛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프리즈에 다녀왔다고 인증샷을 올렸다. 어느 누구는 8시간을 꼬박 정성껏 관람했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프리즈에만 머물렀다고 인증했다. 많은 사람들이 ‘역시..!’ 하고 엄지를 드는 순간에 나는 현장에 있지 않았다. 


프리즈를 본 건 정확히 2011년도부터이다. 전시만 보겠다는 생각으로 런던을 방문 헸던 시기이기도 하다. 런던의 대중교통요금이 비싸서 나는 Pilimco라는 지역에 숙소를 얻고, 전시를 보러 매일 걸어 나갔다. 테이트 같은 곳도 다리만 건너면 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에 그 지역은 나에게 안성맞춤 이었다. 그날은 아마도 아이 웨이 웨이가 터빈 홀에 뿌려둔 해바라기 씨앗들을 보러 다녀온 날이었던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강을 따라 쭉 걷다보니 다리를 따라 나 있는 사우스 뱅크라는 지역에 ‘프리즈 아트 페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 섹션은 미대생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공간이었고, 관람료도 없이 페어를 관람할 수 있었다. 


당시엔 ‘아트 페어’ ‘옥션’ 같은 단어들이 멀게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작품을 판매하는 사람이 주변에 하나도 없었고, 친구들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해서 대학원에 진학했고, 작가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서 생기는 푸념들을 늘어놓던 때였다. 옥션이야 너무 먼 얘기라 가지도 않는다지만, 아트 페어는 어쩐지 한번쯤 가보고 싶었다. 어떤 작품들이 팔리는지 보다는 그런 곳엔 대체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가 더 궁금했다. 가보면 휘황찬란했다. 한번은 아트 페어 사무국에서 일하는 경험도 하게 되었는데, VIP실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서 복장부터 말투, 태도 등등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경직되게 하루 종일 서서 근무했던 아트 페어는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참여 작가들과 몰래 나눠 마신 VIP용 와인 한 잔은, 긴장된 몸을 풀어주기에 나쁘지 않았다. 이후에도 미술관에서는 ‘ㅇ과장 전시장 가는 날’ 뭐 이런 타이틀을 만들어서 100원 미만의 소품들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대학을 갓 졸업한 작가들의 아트페어인 ‘아시아프’라는 행사도 생겼다. 모두 아트페어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시도된 기획들이었다. 그래도 사우스 뱅크의 프리즈를 따라갈 만한 아트 페어는 없었는데, 내 머릿속에 프리즈는 아무도 살 것 같지 않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던, 독특한 아트 페어였다. 영상과 설치 작업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타투를 모티프로 한 작품 등등 학생들의 작품이어서 자유롭다고 하기엔 아트페어가 갖추어 야 할 요건들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즐겁게 페어를 관람했다. 졸업생들은 전시장에서 자기가 손수 만든 명함을 나누어 주기도 했고, 여기저기서 첫 판매를 자축하는 축하파티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때 프리즈를 보면서 나는 막연하게 ‘아트 페어란 판매될 작품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요즘의 작품을 보여주는 곳이구나. 그리고 그런 작품들도 판매가 되는 구나.’ 하고 의아하기도 두근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프리즈는 많은 성공과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동시대 미술을 소개하는 잡지로 출발해서 아트 바젤, 피악과 더불어 ‘세계 3대 아트 페어‘라는 꼬리표도 당당하게 달았다. 그래도 여전히 내게 프리즈는 사우스 뱅크에서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던 자유로움과 당돌함의 아이콘으로 남아있어 언제나 프리즈가 열릴 주간이면 런던을 방문하거나, 프리즈 어워드에 대한 소식을 꼼꼼하게 정독하곤 했다. 이런 프리즈가 서울에서 열린다니! 나처럼 프리즈의 열렬한 팬들은 모두 서울로 모여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애석하게도 이번 프리즈를 가지 못했지만, 실시간 기사와 지인들의 인증샷으로 프리즈를 다른 지점에서 관람했다. ‘PDF 파일만 가지고 작품을 팔았다’ ‘사상 최대 미술품 거래’ ‘아시아 미술의 중심지 서울’과 같이 비판과 환호가 섞인 여러 기사들이 난무 했다. 그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반응은 모 유명 비평가가 얘기한 것처럼 ‘시시했다.’ 혹은 ‘별거 없더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같은 반응들인데, 그의 말이 맞다. 이번에 해외 갤러리들이 가져온 작품들은 미술사에 내놓으라 하는 작가들로 가득했다. 피카소, 루이스 부르주아, 게오르그 바젤리츠, 조르조 모란디, 게르하르 리히터.. 우리는 이런 이름들을 거부할 수 없다. 이미 이들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거장들이고, 미술사에는 이들의 이름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작가들의 작품을 실제로 보고도 ‘별게 없더라’ 하는 사람은 미술사를 부정하는 사람이거나 사실은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거나 그도 아니면, 거장이 아닌 다른 것을 프리즈에 기대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은 나도 그 중 하나인데, 나는 사우스 뱅크에서 열렸던 모습의 프리즈를 기대했다. 프리즈가 서울에 온다면, 뭔가 다른 모습의 서울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이미 프리즈는 너무나 거대한 이름이 되어버린 후였다. 프리즈가 열리기 전부터 국내의 모 갤러리는 프리즈 참가신청 과정을 실시간 sns로 공유하며, 결국 프리즈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아쉬움의 글을 올렸다.아마도 많은 갤러리들이 그랬을 것이다. 생각보다 프리즈는 거대한 존재가 되었고, 프리즈의 문턱은 높았다. 몇 년 전부터 국내에 들어와 있던 유럽베이스의 갤러리들은 프리즈 서울의 개최와 동시에 한국작가를 영입하며 국내 작가 발굴에 대한 비난을 보기 좋기 눌러 버렸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모두 아는 한국 작가가 명예의 전당을 오르듯이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멀리서 지켜보던 나도 프리즈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음에 돌을 맞은 기분이었다. 이번 프리즈는 프리즈가 얼마나 세계적인 아트페어인지, 얼마나 권위가 있는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사우스 뱅크에서 열렸던 프리즈 아트 페어는 무려 11년 전이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우리 모두 사실은 거대한 명예의 전당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일까? 동시대 미술은 점점 더 거대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어느 곳에 올려놓을 것인가. 어느 곳을 보고 달려갈 것인가. 이 일을 시작했던 때와 같이, 지금도 여전히 이 물음은 미지수로 짙게 남아있다.      


- 한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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