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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셋 Nov 22. 2019

" 내 인생에 호들갑 좀 떨지 마."

 호들갑과 배려의 차이


 인생을 살다 보면, 꼭 내 인생이 자기인 것 마냥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때가 있다.


 호들갑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경망스럽고 야단스러운 말이나 행동.'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는 만큼 내 인생에 대해서 호들갑을 떠는 사람을 만나면 도움되는 말은 하나도 없고 기분만 나빠진다.


 내 인생에서 남이 호들갑을 떤다는 것은 마치 인생을 배라고 가정했을 때, 내 배 위에서 노는 저어 대지도 않으면서 발만 구르며 뛰어다니는 느낌을 준다.


 내가 지금 망망대해에서 연약하고 작은 내 배 하나 혼자 저어 가는 대도 스스로 균형 잡기가 힘들어서 죽을 맛인데, 거기에 노를 같이 저어주기라도 하던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오히려 배의 균형을 더 흐트러놓는 꼴인 셈이다.



  내가 인생에서 만나 본 호들갑 떠는 유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한 유형은 대놓고 도움은 안 되면서 훈계질만 하는 유형이다. 그것도 "이런 게 어떨까?" 하는 게 아니라 비난뿐인 말 들만 늘어놓는 사람들 말이다. "네가 이래서 되겠어?"나 "너 나이에 자꾸 늦어져서 되겠니?" "너 그렇게 살아서 나중에 큰 일 난다."와 같은 말을 하면 '내가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내 인생을 막 굴리지는 않았는 데' 와 같은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나빠지곤 한다.


 두 번째 유형은  번째 보다  악질이다. 차라리 대놓고 호들갑 떨면서 말하면 나을지도 모르는 데, 이 유형은 지레짐작으로 내 인생에 호들갑을 떨며 큰 일 난 것처럼 평가하고 '은근히 무시한다.' 


 두 번째 유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를 들어보자면 내 친구가 겪은 일이 있다. 내 친구는 일반 대학원에 다니는데 거기에 전문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이 내 친구가 뭔 말만 하면 피식피식 웃어대더란다. 교수님이 칭찬할 정도로 똑같은 과제를 내 친구가 더 잘해갔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듯이 웃더란다. 능력이 더 뛰어난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더 낫다고 생각하며 남의 인생을 무시하는 것이다. 마치 그게 상대의 과제를 비판하는 것인 양 포장해서 말이다.


 

 그런데 남의 인생에서 이렇게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이다. 차라리 첫 번째 호들갑처럼 대놓고 훈계하듯이 말하면 판단하기 쉽다.


 문제는 두 번째 유형이다. 내가 자격지심이 있어서 꼬아 듣는 건지, 상대가 자격지심 가지라고 꼬아 말하는 건지 이게 참 판단이 쉽지 않다.



 내가 기분이 나쁘다고 다 잘못된 말은 아니지 않은가. 내 배가,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가 자꾸  마음의 배에 조심도  하고 넘어오는   때문인지, 아님 내가 지레 겁먹고 그냥 스스로 흔드는 건지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예전에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아주 쉽게 취직을 한 경우였다. 그런데 밥을 먹으면서 나에게 이런 얘기를 건넸었다.


 " 난 취직이 쉽게 된 경우여서 너한테 취직했다고 말하는 게 조심스럽더라. 너는 공부한다고 힘들었잖아. 너도 참 잘 되어야 할 텐데. "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아니 그냥 취직했다고 말하면 되는데 굳이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생각을 했었다. 이게 호들갑인지 배려인지.


 스스로 내린 결론은 '배려'였다. 평소 성심이 깊은 친구였고 배려심도 많았기에 표현이 서툴렀어도 자기 자랑을 하고 나를 무시하려는 의도보다는 나를 생각하는 지분이 더 크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런데 이후에 찬찬히 생각해보니 남들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이 호들갑인지 배려인지 판단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가 상대를 생각한다고 말한 것인데, 그게 사실은 형식만 배려이고 남의 인생의 배에서 방방 뛰며 호들갑을 떤 게 아닌가.’하는 서늘한 생각이 들었다.


 남이 하는 말조차 판단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스스로에 대해서는 판단해보려는 시도 조차 힘들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고 말을 한 적이 없는지, 호들갑을 떠느라 상처를 마구 내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해봤다.

 

 그러니깐 몇몇 그런 기억이 떠올랐다. 거의  7년째 하나의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에게 일단 원하는 목표가 아니어도 다른 것을 해보면서 병행하는 것이 어떻냐고 했을 때의 내가 오만하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는지와 같은 것들이 말이다.


 난 상대의 기분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말만을 더 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그야말로 호들갑을 떤 것이다.



 이후 호들갑과 배려의 차이가 무엇인지 깊게 고민을 해봤다. 내가 타인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도 필요하지만, 나도 타인의 배에서 호들갑을 떨며 상처를 내면 안 되니깐 말이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친구의 말이 배려인지 호들갑인지를 구분하는지를 깊게 고민해봤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하는 말의 형태가 다듬어지지 않아서 판단하기가 쉽지가 않다. 격양된 어투로 말한다고 나쁜 놈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상냥하게 말한다고 착한 놈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상대가 나를 '어느 정도' 생각하고 말했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분이 어떨지 나의 입장이 어떨지 생각을 해보고 말했다면 그건 그냥 간단하게 퉁쳐서 '배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설사 기분이 나쁘고 서투르더라도 말이다.


 앞선 내 친구도 내 기분이 어떨지를 생각해서 했으니, 나쁜 의도가 담겨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듯이 말이다. 설사 내 배가 흔들리더라도 조심히 넘어오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니깐.




 내 기분을 생각했다고 기분 나쁜   덮어두자는 말은 아니다. 그 생각함의 정도가 적어도 50%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비율을 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상대의 평소 행동과 나를 대했던 태도를 잘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그 비율이 어느 정도만 되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 간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을 듣고 어떨지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은 것은 호들갑이다. 내 배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막 넘어와서 돌아다는 것. 그게 호들갑이다.


 날 생각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가 할 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멀리하는 것이 정답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상사이거나 어른이거나 멀어지면 껄끄러워지는 사이라면 대놓고 내 인생에 호들갑 떨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최대한 거리는 두어야 한다.


 결국, 내가 당장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당장 쉬어간다고 득달같이 남의 배에 넘어와서 호들갑 떠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같다.



 내가 타인에게 남의 인생에서 호들갑을 떠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타인이 호들갑을 떠는지 판단 하려면 이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보려고 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남의 배에 호들갑을 떨려고 들어 가거나 남이 내 배에 호들갑 떨려고 들어 올 때, 밀어내고 경계선을 그을 수 있다.


 그리고 함부로 그 경계선을 넘으려고 할 때,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 내 인생에 호들갑 좀 떨지 마."라고 생각하며 맞대응하거나 거리를 둘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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