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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그릿 Sep 02. 2020

습관성 리셋 증후군?

30여 년 인생살이 대표 키워드

30여 년 인생사 돌아보면 습관성 리셋 증후군이라는 말이 대표로 떠오른다. 습관성 '포기' 증후군이라고도 쓰이는 것 같다. 용두사미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와 정확히 반대되는 말로 다가온다. 뭔가를 잘해나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질리거나 맥이 빠져 그만두고 계속 새로운 일을 찾는다. 한 우물 파질 리가 없다. 초기화가 일상이다.

난 사실 이 분야에서 준프로급은 된다. 우선 대학을 2군데 다녔다. 전공은 3개를 거쳤다. 고등학교는 이과를 졸업하고 공대에 들어갔다가 '적성에 안 맞아서' 한 학기 다닌 뒤 휴학하고 다시 수능을 준비했다. 적성으로 포장했지만 사실 재미가 없었을 뿐이다. 과제하고 당구치고 술만 오지게 먹이더라. 대학 가면 시트콤처럼 다 하하호호 즐거울 줄만 알았다. 근데 당시 남녀 비율이 9.5:0.5 정도였다. 고등학교도 남녀공학이었는데. 남대는 더 다니고 싶지 않았다.


대학 생활 다 이런 건 줄


입학 첫 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학교를 안 나갔다. 그 와중에 신기하게도 신입생 기초 교양과목이던 원어민 영어회화는 재미가 있었나 보다. 1학기 마칠 때까지 그 수업만 가서 들었다. 미적분학, 물리학, 대학 수학, 프로그래밍 등등 전공은 다 제꼈다. 다 제꼈으니 학점은 개판이었을 수밖에. F가 5개, D 1개, B 1개. B는 그 영어회화 과목이다. 어차피 계속 다닐 수 없는 학점이었다. '리셋 심리'가 발동했다.

여름방학에 친구 따라 재수학원 가서 모의고사를 봤다. 문/이과 선택란에 잠깐 고민하다 문과를 택해서 제출했다. 다행히도 당시 공부한 내용을 많이 안 까먹었더라. 괜찮은 점수를 받고 희망차게 바로 재수에 돌입했다. 나쁘지 않은 결과를 받았다. 전공 선택이 남았다. 첫 대학생활 경험이 공대였으니 정반대 성격의 전공을 찾았다. B 받았던 영어회화 과목도 한몫했다. 무려 '영문과'로 진학했으니 말이다. 입학하니 남녀 비율이 3:7이다. 신입생 1호 cc가 됐다. 하하호호 그 대학생활이다.

대학 다니면서 향후 진로 같은 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만 가면 만사 해결이라는 제도권 교육을 받고 자라온 터라, 대학생활이 주는 자유에 취해 20대 초반을 생산성 '0'으로 흘려보냈다. 맨날 놀기만 해서 그랬나, 이별당했지 뭐. 또 리셋할 타이밍이다. 군대나 가자 싶었지만 군대도 내 맘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입영 신청 후 한 학기 더 다녀야 했다. 아 걔랑 자꾸 마주치는데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이번엔 전공 리셋이다.

당시 대세에 따라 경영학을 복수 전공했다. 수업 들어갔더니 다 조모임이다. 당시 내향성이 우세했던 나는 요리조리 피할 방법만 찾아다녔다. 발표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 와중에 또 회계학 원론 수업은 좋은 성적이 나왔다. 이게 내 적성인가? 뭐 하나 찾은 느낌이었다. 근데 일단 군대부터 갔다 오고. 공익이라 생각해보면 여유 시간이 꽤 많았지만, 그땐 주어진 시간을 잘 쓰질 못했다. 방황만 하다 금세 2년 여가 지났다. 바로 복학하긴 괜히 부담스러웠다. 그럼 또 리셋해야지 뭐.

적성인가? 했던 회계 관련 전문자격사(공인회계사) 시험이 또 마침 유행했다. 마침 친한 동기도 준비한다길래, 학원 따라다녔다. 생각해보면 요즘 노량진 공시촌 같은 분위기였던 것 같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유혹은 늘 곁에 있는 법이다. 진짜 공부만 하러 왔으면 사람들과 잘 안 어울리고 공부만 했겠지만, 난 약간 도피성으로 수험생활을 한 터라, 공부를 하긴 했는데 완전히 몰입하진 못했다. 당연히 결과가 좋지 않았다. 또 RESET! (벌써 몇 번째야..)


절규하고 싶다 진짜


이번엔 스케일 키워 물 건너로 리셋했다. 호주 워홀로 반년 정도 생활하다 들어왔다. 당시 무슨 프로그램으로 인턴 하러 간 거라 거기서도 무리 지어 놀러 다녔다. 호주는 소주가 참 비싸더라.. 이름도 화이트 소주였나 우리나라에선 보지도 못했던 건데. 풍광도 좋고 집 떠나 있으니 놀기 딱 좋았다. 영어는 안 늘고 대구 사투리만 늘어왔다. 또 리셋.

그제야 복학했더니 동기들은 거의 다 취업했다. 나도 그냥 취업해야 하나 싶었다. 뒤늦게 토익이니 인적성이니 스터디니 친구 따라 다녔다. (왜 자꾸 친구만 따라다녀) 사람만 모였다 하면 왜 다 술이야. 스터디인지 술터디인지. 8학기에 졸업 못하고 9학기까지 늘어졌다. 여차저차 해서 어떻게 취업은 했다. 문과생 많이 뽑는데 밀어 넣었다. 그러니 그놈의 '적성'에 맞을 리가 있나. 아 또 리셋해야 돼? 3년 꽉 못 채우고 사표 던졌다.




각 잡고 정리해보니 심각한 지경이다. 불편하지만, 불편한 것들을 가까이하려고 노력 중이다. 지금은 덜 일하고 덜 받는 작은 회사로 이직해서 다행히 여태 잘(?) 다니고 있다. 퇴사 안 하고 다니고 있으면 잘 다니는 거다. 결혼하고 육아하며 나름 안정감도 생긴 거 같다. 이젠 더 리셋하면 안 되고, 리셋할 수도 없으니 지금까지 부린 변덕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 온라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새벽 기상 후 블로그에 글 쓴 지 벌써 3달째다. 글쓰기만은 리셋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매일 적어나가는지도 모르겠다.

비슷하게 살아온 분들이 많으실 것 같다. 우리나라 문화 자체가 개인의 개성, 차별성보다는 단체와 전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나. 전체와 부합하는 방향으로 교육이 짜여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나한테 맞는 진로를 생각해볼 시간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그걸 미리 잘하신 분들은 일찌감치 한 우물 파는 거고. 아니면 나처럼 이랬다 저랬다. 계속 리셋하는 거고.

아직 젊으신 분들은 나처럼 많이 방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찌감치 자신의 길을 찾아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 이 글이 읽힐지, 읽힌다면 어떤 분들이 읽어주실지 알 수 없지만, 방황하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습관적으로 인생 리셋하고 살다가, 혼자 새벽에 일어나 글 쓰는 나 같은 아저씨도 있다는 걸 보고 힘을 얻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그런 글을 계속 써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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