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과학자의 책임 윤리를 바탕으로 오펜하이머 겉핥기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킬리언 머피,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외)
* 이 글에는 오펜하이머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의 일대기, 특히 트리니티 실험과 그 이후 미 원자력 위원회(이후 AEC/US Atomic Energy commission) 보안 인가 청문회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전기 영화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들은 플롯과 편집에 있어서는 강점을 지니지만 개인의 인물 묘사에는 약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이를 의식한 것인지, 이번 영화에서는 아예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시점으로 그가 겪었을 심리적 현상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 오펜하이머의 입체적이면서도 어찌 보면 모순된 행보를 그의 관점에서 보다 세밀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이데거가 주장한 ‘탈은폐’의 개념을 통해 오펜하이머가 자연 속 진리를 탐구하고 자신이 주도한 원자폭탄 개발의 결과를 목도하는 과정을 분석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자에 대한 책임 윤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영화는 크게 두 줄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컬러로 촬영된 핵분열 파트와 흑백으로 촬영된 핵융합 파트가 그것인데요. 표면적으로 핵분열 파트는 핵분열을 기반으로 하는 원자 폭탄의 개발과 관련된 이야기, 핵융합 파트는 수소핵의 융합을 기반으로 하는 수소 폭탄의 개발과 그 여파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두 파트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당시 상황을 나타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핵분열 파트는 오펜하이머의 시선, 핵융합 파트는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의 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을 바탕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각각의 입장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영화는 젊은 오펜하이머가 눈을 뜨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과의 대화 이후, 나이 든 오펜하이머가 눈을 감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이는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오펜하이머 본인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눈은 무언가를 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눈을 통해 들어온 시각정보를 토대로 우리는 세상을 인식합니다. 즉 눈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상징합니다. 저는 오펜하이머가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모순들을 편견 없이 바라본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영화는 그를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색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지닌 존재로 그립니다.
젊은 시절, 그가 주로 바라본 대상은 미시세계의 아주 작은 양자부터, 별의 죽음으로 형성된 거대한 블랙홀에 이르는 자연 현상들이었습니다. 물웅덩이 위로 내리는 빗방울의 파문을 바라보는 장면, 이후 양자 세계의 환영을 보는 장면 등을 통해 우리는 그가 그 시기에 어떤 것에 주목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시기에 그의 시선은 여러 인간들이 모여 다양한 가치들이 모순을 이루는 이 세상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AEC에서 소련 주요 도시들을 나타낸 지도 위로 파문이 일고, 아인슈타인과의 대화를 마친 후 그가 바라본 호수의 파문들이 마치 미사일 폭격을 맞이한 전 인류의 암울한 미래의 환영으로 치환되는 씬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시선을 다른 측면에서 해석해 본다면,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오펜하이머의 시선은 원자 폭탄의 당위성과 그를 만들 수 있는 기술적인 부분으로만 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일본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후, 그 결과에 대한 브리핑을 그는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 브리핑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 비로소 자신이 만든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명료하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연구했던 업적이 이 세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원자 폭탄이 만들어진 순간까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참상을 목도한 후 그것이 지니는 끔찍한 의미를 후폭풍이 몰아치듯 일순간 깨달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그의 시선의 차이는 트리니티 실험 씬을 통해 상징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핵폭발의 섬광이 솟아오를 때, 보안경을 끼고 바라봅니다. 보안경을 끼는 행위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시각정보를 제한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원자 폭탄을 개발할 때 그 결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개발에 효율적인 것처럼 말이죠. 폭발의 섬광이 지난 후 그는 보안경을 벗습니다. 그리고 핵폭발의 후폭풍을 맨눈으로 맞이합니다. 마치 원폭 이후 그 결과를 마주하자 비로소 자신이 개발한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가 한창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가장 시각적으로 인상 깊은 이미지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상징하는 구슬, 그리고 플루토늄을 내폭할 수 있는 폭발물이 점차 쌓여가는 이미지였습니다. 이는 원자 폭탄을 완성해야 하는 일종의 데드라인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요. 그 당시 오펜하이머의 시선 역시 눈으로 볼 수 있는 촉박함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표에 집중하다 보면, 종종 주변의 다른 것들을 놓치기 쉽습니다. 데드라인은 당면 목표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구슬 혹은 폭발물은 그 목표가 초래할 결과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인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오펜하이머의 시선은 오로지 원자 폭탄의 완성에만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핵폭발의 후폭풍이 섬광 이후 시간 차를 두고 몰려온 것처럼, 오펜하이머의 죄책감 역시 시간 차를 두고 그를 괴롭힌 것으로 보입니다. 원자 폭탄의 성공적인 폭발을 축하하는 연설 자리에서 그가 바라본 끔찍한 환상은 그런 그의 죄책감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축하하는 사람들의 발소리는 마치 군대의 행진 소리처럼 들리고, 가장 기뻐해야 하는 그 순간에 폭발 피해자들의 모습이 오버랩된 것처럼 말이죠.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환호를 받는 그 순간, 가장 큰 죄책감을 느끼는 아이러니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선의 변화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수소 폭탄을 저지하려고 했던 그의 모순된 행보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그의 편견 없는 시선은, 세간의 상식과는 대비되는 그의 행동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자신의 부인인 키티(에밀리 블런트 분)를 사랑하면서도, 진 태트록(플로렌스 퓨 분)과의 내연을 이어가고,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을 꺼려했지만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였으며, 원자 폭탄을 만드는 것을 주도하였으나 수소 폭탄을 만드는 것에는 반대하는 등의 모습은 그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여러 부조리함과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떤 정해진 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보다, 여러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오펜하이머는 세상의 모순을 편견 없이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펜하이머의 시점이 그려진 핵분열 파트는 컬러로 촬영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색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죠.
스트로스의 정부 각료 청문회는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가 청문회보다도 훨씬 뒤의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흑백 화면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오펜하이머의 이야기와 스트로스의 이야기를 대조함으로써 관객에게 이야기의 흐름을 잘 따라올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굳이 스트로스의 이야기를 흑백으로 만든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스트로스라는 인물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가 바라보고 목표로 하는 것은 오직 정부의 각료가 되는 것입니다. 즉 그는 자신의 야망이라는 하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틀로 세상을 볼 때, 세상은 그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한 색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는 세상을 자신의 야망을 채울 수 있는 것과 아닌 것, 친구와 적처럼 이분법적인 흑백논리로 바라본 것으로 보입니다. 흑백 촬영은 이와 같은 그의 시선을 반영한 촬영이라 생각합니다.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가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스트로스 역시 청문회를 재판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후술 하겠지만, 오펜하이머가 생각한 재판은 내부, 즉 원폭 피해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의 재판입니다. 반면 스트로스가 생각하는 재판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외부(적)로부터의 재판입니다. 스트로스는 그가 오펜하이머에게 했던 행동들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행동들이 자신의 적들에게는 자신을 몰락시킬 만한 건수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에게 지었던 죄는 스트로스 자신만의 편견으로 오펜하이머를 오해하고 판단하며, 그를 바탕으로 오펜하이머를 나락으로 보낸 죄일 것입니다. 스트로스는 오만한 인물인 오펜하이머가 자신에게 망신을 준 것에 대해 복수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적으로 분류된 것입니다. 따라서 기밀문서를 유출해 가면서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그에게 보안 인가 청문회에 나서서 그의 사생활이 폭로되도록 음모를 꾸몄습니다. 즉 오펜하이머의 몰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죠. 이 모든 일들이 세상을 자신과 자신에 대항하는 적으로 본 스트로스의 시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 Martin, 1889-1976)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분류되지만, 그 자신은 자신을 실존주의로 분류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랬던 그가 아주 이른 시기에 과학기술이 갖는 윤리적 함의에 대해 논의했다는 점은 그의 정치적 행보와 다소 모순되면서도 고무적입니다. 그가 이런 주장을 했던 당시까지만 해도 과학기술이 지금과 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학계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해 염려하는 그의 태도를 의아하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른 현대사회에 있어 그가 주장한 과학기술 윤리는 꽤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기술이 단순히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심지어 과학 기술을 가치중립적으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기술에 무방비 상태로 내맡겨질 수 있다고도 주장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기술이란 사물을 ‘탈은폐’시키는 방식입니다. ‘탈은폐’란, 사물 또는 존재자의 내면에 감추어진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을 의미합니다. 즉, 현대 기술에서의 탈은폐는 인간을 위해 자연에 무엇인가를 내놓으라는 ‘도발적 요청(Herausfordern)’ 혹은 ‘닦달(stellen)’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 현대의 광공업 기술은 자연에 숨겨진 에너지를 채굴하고, 이를 변형하여 저장하고, 다시 분배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닦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인간이 자연의 에너지를 채굴해 내라는 도발적 요청을 받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현대 기술의 부품으로 전락한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기술을 단순히 도구로만 여겼을 때 우리는 기술의 부품이 될 수 있으므로, 기술에 가치가 개입되어 있음을 이해하고, 신중하게 기술을 연구하고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이데거는 우리의 이성을 단순히 기술을 계산하는 사유(도구적 이성)만으로 사용하게 될 경우에 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골똘히 몰입하는 생각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즉 인간은 기술의 부품으로써 단순히 기술을 개발하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혹은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어떤 것을 잃게 된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양자 물리학을 연구하면서, 양자 세계가 지닌 비밀을 ‘탈은폐’ 시키고자 합니다. 그의 학부생 시절, 그는 양자 세계의 진리를 파악하고자 애씁니다. 이때 그의 시선은 아마도 자연 그 자체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할 당시 그에게 있어 탈은폐는 우라늄 혹은 플루토늄으로부터 파괴력을 ‘닦달’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원자 폭탄은 질량 수가 큰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켜 발생하는 연쇄 반응에 따른 강력한 폭발력을 지니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이 탈은폐한 파괴력이 가져올 다른 의미의 연쇄 반응을 보게 됩니다. 즉 원자 폭탄 개발로 촉발된 강대국 사이의 치열한 군비 경쟁, 그리고 그 경쟁이 인류에게 가져올 파멸이라는 연쇄 반응을 지켜보게 된 것이죠.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불을 훔쳤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에게 주었다.
이로 인해 그는 바위에 쇠사슬로 묶인 채 영원히 고문을 받아야 했다.”
영화는 폭발하는 불길 속에서 위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그가 앞으로 어떤 업적을 이룰 것이며, 그로 인해 어떤 고난을 겪게 될 것인지를 함축적으로 나타냅니다.
오펜하이머가 겪은 모든 사건의 회상은 그의 보안 인가 청문회를 통해 플래시백의 형태로 보여줍니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청문회를 이끄는 인사에게 재판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그가 원자 폭탄의 성공에 대해 과학자로서 책임감을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연구한 결과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청문회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변명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의 아내 키티는 오펜하이머에게 왜 싸우지 않느냐고 묻지만, 애초에 오펜하이머는 이 청문회에서 싸울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자신의 모순적인 사생활을 드러낸 이유는 원폭 피해에 대한 그의 죄책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과학자의 책임을 어디까지 한정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입장을 보여줍니다. 먼저 과학자에게는 연구 내적인 책임만 존재한다는 입장입니다. 즉, 과학기술 활용의 결과에 대해서는 그 기술을 활용한 활용자(정치가)에게 있다는 입장인데요.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과학자는 과학 기술 연구에 있어서 특히 그 결과에 대한 책임에 있어서 자유로워야 더 나은 기술 발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과학자에게는 연구 내적인 책임뿐 아니라 연구 결과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까지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과학기술의 연구에는 과학자의 가치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으며, 그 기술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으므로 그 기술 활용의 결과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이 만들어지고 실제 사용되기까지, 원자 폭탄이 인류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명감이라는 책임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그는 과학자에게 있어 연구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초반부터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책임 의식은 원폭 이후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게 된 후, 희생자들에 대한 죄의식으로 치환됩니다. 앞서 프로메테우스가 겪었던 영원한 고문은, 오펜하이머에게 있어 10만이 넘는 희생자를 낳은 원폭에 대한 죄의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보안 인가 청문회에서 검사 역할을 맡았던 로저 롭(제이슨 클라크 분)은 그런 그의 죄의식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청문회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낳은 원자 폭탄을 만든 당신이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을 하는 과정에서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장에 원폭이 가해지는 것과 같은 환상을 겪게 됩니다. 즉 과학자가 지니는 사회적 책임을 추궁할 때에 오펜하이머 역시 원폭을 맞은 것과 마찬가지의 심리적인 충격과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과학자의 책임윤리를 가르칠 때, 가장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람이 오펜하이머입니다. 그런데 수업을 할 때 오펜하이머는 과학자의 책임을 연구 내적 책임으로 한정 짓는 대표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는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과학자도 자신의 연구와 실험 결과가 인류의 복지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 또는 유해할 것인가를 측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가치 판단의 문제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를 통하여 발견한 진리를 공표할 책임만을 가진다. … 예를 들면 원자 폭탄의 제조 행위는 과학자와 기술인들의 행위이다. 그와 같은 행위는 가치중립적이며 순수 학문적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정치적 결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행위라고 볼 수 없다. 원자 폭탄을 제조하도록 정책을 입안하고 그 연구 결과를 전쟁 수행에 이용하려고 했던 것은 정치인들이다.”
영화에서 이와 같은 논리로 말한 것은 트루먼 대통령(게리 올드먼 분)이었습니다. 자기 손에 피가 묻은 것 같다는 오펜하이머의 말에 트루먼은 울보를 들이지 말라며 일갈합니다. 원폭을 지시한 사람은 자신이라면서 말이죠. 이는 과학기술 결과의 책임이 과학자가 아닌 과학기술 사용자에게 있다는 논리와 일치합니다. 사실 오펜하이머가 트루먼에게 했던 말은, 과학자가 과학기술의 결과에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위에 제시된 인용문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역시도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이 지닌 모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과학자에게 과학기술의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다만, 과학기술을 개발할 때 조금이라도 위험이 예상된다면, 신중할 필요는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의 주장처럼, 인류에게는 미래세대와 환경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큰 힘(과학기술)이 있으므로, 그 힘에 비례하는 큰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놀랍게 발전하는 과학기술 앞에서도 그 기술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골똘히’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 때 인류가 기술의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고, 인류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1) 김향선. (2000). 하이데거의 기술 (대동철학 제11집 2000.) [신흥대학]. his.pusan.ac.kr
2)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이학사)(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옮김)
** 출처: 홍영두, “철학에서 정치로”(이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