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와 장자의 이론을 중심으로 카우보이의 노래 겉핥기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 2018)(감독: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출연: 제임스 프랭코, 리암 니슨, 팀 블레이크 넬슨 외)
* 이 글에는 카우보이의 노래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서부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크게 주목받는 장르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개인적으로 서부극의 정서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이 영화는 서부극이 갖는 여러 매력을 적절하고 무겁지 않게 엮은 일종의 옴니버스 식 영화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예측하지 못한 여러 사고들로 예측하지 못한 결말에 도달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그리는, 법이 있지만 법이 통치하지 못했던 서부 시대의 모습을 통해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매킨타이어의 ‘서사적 자아’ 개념에 기초한 준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장자의 이론과 함께 알아보려 합니다.
서부 시대의 무법자들과 그들의 이야기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법자들에 가깝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버스터 스크럭스(팀 블레이크 넬슨 분)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제임스 프랭코가 연기한 이름 모를 한 사내가 그들이죠.
먼저 버스터 스크럭스의 경우, 그 자신은 날씬하고 수다쟁이 같은 사람이지만, 악명 높은 무법자입니다. 그는 노래를 즐기며 시종일관 여유롭고 밝은 표정을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행동은 무자비합니다. 일견 예의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부조리한 모습도 종종 보입니다. 그가 길을 걸어갈 때 그의 주변에는 절벽들(혹은 건물들)이 위치합니다. 이는 그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약속을 어느 정도는 지키려고 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약속을 지키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갑니다.
프랑스인의 협곡이라는 마을에 들어선 그는 어떤 사건에 휘말려 즐겁게 두 건의 살인을 저지릅니다. 살인 후에 피해자를 모욕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죠. 두 번째 살인 후에도 그는 역시 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그때 멀리서 하모니카 소리가 들립니다. 그의 옷차림과는 대조적인 검은 옷을 입은 사내(윌리 왓슨 분)로부터 말이죠. 버스터 스크럭스는 자신을 샌사바의 노래하는 새로 불리길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그런 별명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죽음의 전조라 부른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버스터 스크럭스의 별명을 정확히 불러줍니다. 그리고 그는 버스터 스크럭스가 피해자에게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버스터 스크럭스를 살해합니다. 자신을 유일하게 알아준 이에게 죽임을 당한 이 상황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화는 폭력의 연속성과 순환 고리를 동일한 패턴의 살인 장면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냅니다. 검은 옷의 사내는 이후 버스터와 마찬가지로 노래를 부르며 자신만의 길을 갑니다. 그 역시 또 다른 실력자에게 죽임을 당할 운명일까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사내(제임스 프랑코 분)는 은행 앞에 서 있습니다. 은행은 돈을 향한 사내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옆으로 Bad Water, 즉, 마실 수 없다는 표지가 걸린 우물이 보입니다. 이는 그의 욕망이 결코 채워질 수 없음을 은유합니다. 은행 안 금고 앞에 선 사내는 은행원과 철창을 사이에 두고 대화합니다. 그러나 은행원에게 총을 겨눈 그를 비추는 카메라는 마치 그가 철창에 갇힌 것처럼 묘사합니다. 이는 그의 운명을 암시함과 동시에 그가 욕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암시합니다. 결국 그는 돈을 들고 자신의 말을 향해 가다가 갑작스러운 은행원의 공격에 마실 수 없는 그 우물 옆으로 피신합니다. 그가 훔친 돈다발이 벌판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며 말이죠. 그리고 은행원의 일격에 그는 기절합니다.
기절했던 그의 눈앞에는 판사와 보안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그가 기절한 사이 이미 판결은 내려졌습니다. 그의 목에는 교수형 밧줄이 걸려 있습니다. 갑자기, 판사와 보안관들에게 미국 원주민들이 공격을 가합니다. 사내와 마찬가지로, 당시 미국 땅을 무단으로 훔쳐간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일까요. 판사와 보안관은 모두 몰살당합니다. 아직도 목에 밧줄이 매여져 있는 사내. 시간이 흐른 후 그런 그에게 다가오는 카우보이가 있습니다. 카우보이는 사내를 구해주고는 소를 몰자고 이야기합니다. 이윽고 누군가가 다가오자 줄행랑치는 카우보이. 영문을 모르고 가만히 있던 사내는 결국 다시 재판에 넘겨집니다. 죄목은 소 강탈. 이번 재판에서 역시 피고인은 변론을 할 수 없습니다. 불법이 쉽게 자행되는 만큼 법 집행 역시 쉽게 자행됩니다. 다시 한번 교수형에 처하게 된 사내. 그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눈에 비친 한 여인을 보며 웃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욕망만을 좇다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납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호텔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해 질 녘 마차는 달리고 있고, 한 남자의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노래가 끝날 때쯤 잠에서 깬 한 남자는 자신을 사냥꾼이라 소개하며 혼자만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늘어놓습니다. 노 숙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출장 간 남편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프랑스인은 노 숙녀의 말 혹은 그녀의 삶을 평가하며 모두는 각자의 삶을 살고,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자신의 자유주의적 관점을 이야기합니다. 노 숙녀와 프랑스인은 노 숙녀의 삶과 편협한 관점에 대해 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다 노 숙녀가 발작을 일으키고 좌중은 조용해집니다. 해가 지고 사위는 어두워졌습니다.
그때 처음 노래를 부르던 남자(존조 오닐 분)로부터 클러랜스(브렌단 글리슨 분)라 불린 남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클러랜스의 옆에 있던 남자는 그 자신과 클러랜스의 작업인, 현상금 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한밤 중에 찾아온 손님”이라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홀린 현상수배범을 뒤에서 내리쳐 현상금을 얻는 자신들의 작업방식을 설명합니다. 그는 청자들이 이야기에 안달하는 이유는 이야기를 자신과 연결 짓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야기 속 인물이 우리 자신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아닐 때, 더욱 이야기에 집중한다고 말이죠. 이는 이야기에 대한 감독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종합예술입니다. 간혹 어떤 감독들은 시나리오를 쓸 때 캐릭터들을 상황에 던지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반응할지 상상한다고 합니다. 이는 가상의 캐릭터 역시 상황 속에서 자신이 겪어온 과거의 이야기에 기반하여 새로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책이라는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윽고 호텔에 도착한 두 현상금 사냥꾼은 범법자 시체를 둘러메고 호텔 중앙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어 마치 천국으로 올라가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매킨타이어의 서사적 자아와 준법의 당위성
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법 따위는 가볍게 무시합니다. 당시 서부 사회에도 법은 존재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흉악한 사건들이 연상됩니다. 서부극의 범죄자와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흉악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서부극 시대의 미국인들은 개척을 위해 가족을 떠나 홀로서기를 해야 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는 상황이었죠. 현대인들은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살지만,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 개인으로 존재하기 쉬운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 같이 파편화된 개인은 공동체를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당장 자기 삶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기 때문이죠. 따라서 그로 인한 욕구의 충족 혹은 분노의 표출은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공동체가 없으니까요. 따라서 준법 역시 그들에게는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을 겁니다.
사회에 속한 인간이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국의 철학자 흄(David Hume, 1711-1776)은 인간이 국가 혹은 공동체로부터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은 혜택론의 맹점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느낀다면 법을 지킬 당위성이 사라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나 로크(John Locke, 1632-1704) 등 사회계약론자들은 국가의 명령을 따르기로 개인들이 동의했기 때문에 법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은 동의론의 맹점은, 우리가 언제 동의했는지, 동의하기 전에 계약 내용을 완전히 인지하였는지 알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계약론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앞선 사회계약론자들과는 다소 다른 이론을 제시합니다. 앞선 사회계약론자들은 현재 사회가 계약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현재 정권을 옹호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소는 현재 우리가 잘못된 사회계약을 맺었고, 그 결과 우리는 불평등이라는 사슬에 매여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당위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가 필요하다고 여긴 새로운 사회계약은 개인의 이기적인 권리보다, 사회의 공동선을 중시하는 의지인 ‘일반의지’를 형성하는 계약을 의미합니다. 일반의지란 모든 개인이 지닌 의지 중 공동의 이익을 중시하는 의지로써, 모든 시민이 공유하는 의지를 말합니다. 따라서 국가 공동체의 방향을 좌우하는 정치적인 결정은 개인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이른바 선심성 공약 혹은 특정 몇몇의 이익을 지켜주는 공약)이 아니라, 공동선을 중시하는 ‘일반의지’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법은 이러한 일반의지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법이 일반의지, 즉 공동선을 향한 의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사회가 루소가 생각한 일반의지로 인해 형성된 사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법을 지키는 이유는 공동선에 근거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선이 무너지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공동체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공동체가 혼란에 빠진다면 우리 역시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을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선은 공동의 선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논리로 준법을 논의하고자 한다면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공동체와 공동선을 중시하는 관점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 말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된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는 공동체의 가치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중시하다 보면 개인의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는 논리로 말이죠.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추상적인 개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공동체의 맥락과 역사, 그리고 나의 가족과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 자아를 전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이기심을 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을 정당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나의 선은 공동선에 근거한다는 공동체주의, 혹은 공화주의의 아이디어는 공동체의 전통과 역사로부터 내가 존재한다는 공동체적 자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의 연대와 협력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때 공동체적 자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개념이 바로 매킨타이어(Alasdair Chalmers MacIntyre, 1929-)의 ‘서사적 자아’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은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고,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즉 모든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혹은 자신을 둘러싼 공동체의 이야기 속에 속해 있으며 그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자아를 매킨타이어는 “서사적 자아(narrative self)”라 부릅니다. 서사적 자아는 다른 서사적 자아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자신만의 야이가를 만들어 냅니다. 서사적 자아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협동하거나 때로는 상충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은 각기 다른 서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그들이 마차라는 작은 공간에 모여 상호작용하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듭니다. 그리고 현상금 사냥꾼은 자신은 이야기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이야기가 존재한다면, 그 이야기 속 인물은 계속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는 현대 공화주의의 용어인 ‘시민적 덕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사적 자아에 기반하여 눈앞에 놓인 나의 이익보다 공동선을 중시하고, 자발적으로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인 ‘시민적 덕성’을 지닌다면, 사회는 서로를 배려하고 기꺼이 도와줄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법을 지킨다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법을 지킴으로써 공동선이 실현될 수 있다는 준법의 당위성이 확보될 것입니다. 물론 법이 공동선을 벗어난 경우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루소는 그러한 법이나 정권에 대해서는 저항을 통해 공동선을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공화주의 역시 공동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시민들이 기꺼이 참여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즉, 준법과 시민 불복종***은 모두 공동선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속 등장하는 무법자들이나, 현실에서 흉악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들에게는 위와 같은 ‘시민적 덕성’이 부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공동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민적 덕성이 교육을 통해 실현될 때 준법이 제대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동체의 무관심 역시 존재했을 수 있습니다. 이에 국가에서는 시민교육을 정책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이에 대한 여러 교육 방법들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윤리 수업을 통해 시민적 덕성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게 될 때 공동체 속의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고 배려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개인의 이기적 욕구에 지배되는 개인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보여주고 그 삯으로 살아가는 한 남자(리암 니슨 분)가 있습니다. 그는 팔다리가 잘린 한 청년(해리 멜링 분)을 데리고 유랑합니다. 공연은 그 청년이 말하는 이야기 그 자체입니다. 청년은 카리스마스 있는 표현과 이야기로 좌중을 압도합니다. 관객들은 홀린 듯 그 청년의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면 청년을 데리고 유랑하는 그 남자가 돈을 걷습니다. 청년은 그 남자의 돈벌이 수단입니다. 그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 둘 만 있을 때, 둘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이야기도 오고 가지 않습니다. 둘은 청년의 이야기로 벌어먹고 살지만, 정작 둘 사이에는 어떤 이야기나 소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둘 사이는 마치 모닥불을 사이에 둔 그들의 모습처럼 대척점에 놓인 것 같습니다.
청년의 이야기가 돈이 되는 시기에 마차는 좌에서 우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돈벌이가 되고 있기에 남자는 청년의 ‘생존’에 신경 씁니다. 정확하게는 ‘생존에만’ 신경 씁니다. 그러나 점차 남자는 청년에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청년의 이야기가 돈벌이가 되지 않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자가 우연히 발견한 계산하는 닭은 청년의 이야기에 비해 돈이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우에서 좌로 이동하는 마차. 마차 안에는 청년과 닭이 함께 있습니다. 닭을 바라보는 청년의 표정은 밝지 않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감지하기라도 한 걸까요. 남자는 강가에 마차를 세우고는, 청년을 향해 다가섭니다. 그리고 닭만 홀로 남은 마차를 끌고 남자는 또다시 유랑을 떠납니다. 닭이 돈이 되는 시기에 좌에서 우로 이동하며 말이죠.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물욕을 지닌 인간이 자연에 침입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태양이 산 위로 떠올라 산맥을 비추자, 강가는 반짝이고 꽃들은 산들바람에 나부낍니다. 사슴과 물고기, 나비와 새들은 자유롭게 자연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때 한 노인(톰 웨이츠 분)이 노래를 부르며 수풀을 헤치고 대자연으로 침입합니다. 그러자 모든 동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를 떠납니다. 이는 모든 사건이 끝나고 노인이 수풀 속으로 사라지자, 모든 동물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장면과 대비됩니다.
노인은 강가에서 사금을 발견하고는 체계적인 방식으로 금맥을 찾기 시작합니다. 아니, 체계적인 방식으로 자연을 훼손하기 시작합니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돈벌이의 수단입니다. 그가 사금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투명했던 강물은 진흙으로 흐려집니다. 그는 식사를 하기 위해 물고기를 잡으며 멀리 날아가는 새를 바라봅니다. 그에게 있어 새가 날아든 방향은 그가 먹을 아침, 즉 새알이 있는 방향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연이 아닌 금광을 향해 지속적으로 말을 건넵니다. 그는 자신이 목적으로 삼는 금 이외에 다른 자연물에는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금은 자연이지만, 그것의 경제적 가치를 매기는 것은 인간입니다. 노인은 인간이 만든 경제적인 가치를 위해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결국 금광을 찾아낸 노인. 그러나 한 청년에 의해 기습적인 총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까스로 청년을 제압한 노인은 청년을 향해 총을 쏴 죽이는 것 역시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인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올빼미를, 영화는 로우앵글로 잡습니다. 마치 자연이 노인을 내려다보듯 말이죠.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오빠의 의해 결혼 길에 오른 앨리스 롱거바우(조이 카잔 분)와 그들의 마차 행렬을 이끄는 빌리 냅(빌 헤크)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앨리스의 오빠는 확실하지 않은 사업, 그리고 일종의 정략결혼을 위해 앨리스를 데리고 오리건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나 이동 중에 그는 병에 걸려 사망하였고, 그를 땅에 묻으면서 그가 갖고 있던 모든 돈까지 그와 함께 묻혔습니다. 그 와중에 그가 데리고 다니던 강아지인 피어스 대통령은 짖는 소리로 인한 민원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카메라는 역마차들이 화면의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비춥니다. 이때 앨리스의 인생 여정은 앞날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마차를 이끄는 남자는 마차비를 터무니없이 높이 불렀고, 돈을 줄 수 있는지 확실히 알려달라고 재촉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도 없이 이 상황을 해결하기 버겁습니다. 그래서 마차 행렬을 이끄는 빌리 냅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빌리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차는 계속 여정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며칠의 고민 끝에 빌리는 앨리스에게 청혼을 합니다. 마침 앨리스의 상황이 좋지도 않을뿐더러 빌리 자신도 정착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앨리스 역시 빌리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이때부터 마차 행렬의 방향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변화했습니다. 마치 앨리스 혹은 빌리의 삶의 방향이 바뀐 것처럼 말이죠. 그날 저녁, 앨리스와 빌리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앨리스의 오빠는 항상 보편적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데 비해, 앨리스 자신은 굳은 신념이 없다고, 그것이 자신의 단점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빌리는 불확실성이야 말로 삶의 필수요소라 이야기합니다. 이는 이들 사이에 불확실한 어떤 사건이 있을 것이란 점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다음날, 피어스 대통령이 짖는 소리에 행렬에서 이탈한 앨리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좇는 또 다른 행렬 인도인 아서. 앨리스를 찾은 아서는 먼 언덕으로부터 다가오는 미국 원주민들과 싸우게 되는데, 그 와중에 앨리스에게 권총을 주어주며, 자신이 죽을 경우 자살할 것을 권고합니다. 결국 아서는 미국 원주민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으나, 아서가 죽은 줄 알았던 앨리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이후 마차 행렬의 방향은 다시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동합니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와 안명(安命)
세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영화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비춥니다. 특히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리암 니슨이 연기한 남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두 수단으로만 대우합니다. 이는 보는 이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데요. 아마도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1724-1804)가 제시한 정언명령의 두 번째 정식을 노골적으로 위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언명령(무조건적인 도덕적 명령)의 두 번째 정식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특히 팔다리가 없는 청년을 대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관객은 존중이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네 번째 에피소드의 노인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금광을 캐는 사람으로, 겉으로 볼 때 어떤 불편함을 느끼긴 어렵습니다. 자신을 죽이고자 한 남자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장면에서는 간접적으로 느낄 수는 있으나 정당방위였다는 차원에서 볼 때 그 노인을 비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두 남자는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요. 바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장자(莊子, BC 369-BC 289)는 이 세상의 모든 혼란은 자기중심적인 편견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이익’이라는, 혹은 ‘물질적 부’라는 가치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위적인 가치입니다. 인간은 흔히 자신들이 만든 인위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며, 그 기준에 따라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을 나눕니다. 이는 인간이 지닌 자기중심적인 편견입니다. 장자는 이와 같은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편견을 ‘제물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마다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여인들이지만 물고기가 그들을 보면 물속 깊이 숨어버리고, 새가 그들을 보면 높이 날아가 버리며 사슴이 그들을 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버린다.”라고 말이죠. 이는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자연의 관점에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한낱 인간의 욕망은 초라할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와 같은 인위적 가치와, 그로 인한 자기중심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소요유(逍遙遊)’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소요유란, 말 그대로 자유롭게 거닐며 노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자기중심적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난 정신적 자유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인위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즉, 우리는 돈, 명예, 권력뿐 아니라 단순히 안락한 삶(흔히 불로소득의 상징인 건물주의 삶 등)을 추구합니다.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런 인위적 가치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영화 속 두 남자는 결말 부분에서 자신의 그토록 추구했던 그 ‘이익’을 얻은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추구하던 이익에 예속된 삶을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이익을 얻어서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장자는 이렇듯 정신적 자유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 즉 명(命)에 순응하는 자세인 안명(安命)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삶은 불확실성, 즉 우연성의 연속인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다섯 번째 에피소드의 앨리스와 냅의 상황과 같이 말입니다. 앨리스의 오빠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앨리스 역시 갑작스럽게 등장한 미국 원주민 무리로 인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빌리의 입장에서는 드디어 자신도 정착하고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차 행렬에서 갑자기 이탈한 앨리스의 동선처럼, 그의 삶 혹은 앨리스의 삶도 갑작스러운 운명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확실성은, 인간의 관점에서 운명을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모든 일이 정해져 있다는 필연성을 전제합니다. 빌리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앨리스의 죽음은 엄청난 비극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앨리스의 죽음에도 마차 행렬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어집니다. 즉 자연의 관점에서 이는 단지 필연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거대한 운명 앞에서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안명, 즉 운명에 순응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명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위적 가치에 매이지 않는 정신적 자유인 소요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문예출판사)
** 김대오. (2007).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현대적 계승 – 매킨타이어의 덕 윤리(서양고전학연구 no.28 2007) [한신대]. https://www.kci.go.kr
*** 시민 불복종: 체제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시민들이 정의롭지 못한 일부 법이나 정책을 교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하는 의도적인 위법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