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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Jul 17. 2024

이중섭의 애틋한 편지 그림과 이우환의 명작

석기자미술관(72) 서울미술관 소장품전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처자식을 일본에 보내고 홀로 남은 이중섭은 가족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편지로 달랬다. 지금 남아 있는 편지가 100통이 넘는다. 그냥 글만 적은 게 아니라 화가답게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것이 오늘날 ‘편지화’라는 이름으로 이중섭 예술의 한 장르를 이뤘다. 이중섭은 특히 생전에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같은 편지를 두 개 만들어서 큰아들과 작은아들에게 같이 보냈다. 누구 건지는 편지에 적힌 이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서울미술관이 최근에 소장한 이중섭의 편지화를 처음으로 소장품전을 통해 공개했다. 이 편지는 이중섭이 1954년 10월 28일에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것으로, 이중섭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작고하기 전에 가족이 여사의 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편지 여러 통 가운데 하나다. 큰아들 태현과 작은아들 태성에게 보낸 같은 편지가 나란히 나왔는데, 이번에 공개된 편지는 세상을 떠난 큰아들의 것이다. 작은아들의 편지는 본인이 간직하고 있다.     



편지는 모두 석 장이다. 글만 빼곡하게 적은 것이 하나, 그림과 글을 함께 담은 것이 두 장이다. 먼저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린 것이 있다. 연화대 위에 앉은 부처와 같은 모습을 한 아내를 중심으로 양쪽에 복숭아를 타고 노는 두 아들을 그렸다. 글만 있는 편지에 “복숭아가 있는 그림은 엄마와 태현군과 태성군이에요.”라고 적혀 있다. 그림 상단의 오른쪽에 태현군이라는 글씨가 보이고, 편지 아래에는 이중섭의 서명이 있다. 일상적인 편지 그림인데도 독자성을 인정받는 근거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이중섭이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그 장면을 엄마와 두 아들이 흐뭇하게 바라본다. 편지 왼쪽에 세로로 “아빠가 잠바를 입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글만 있는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아빠는 건강하게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아빠가 있는 경성은 너희가 있는 미슈쿠보다 추운 곳입니다기차로 몇 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있던 아빠의 잠바를 오늘 아빠의 친구가 가지고 와주어서 아빠는 매우 기뻐요이보다 더 추워도 아빠는 따뜻한 양피 잠바를 입고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나처럼 태현군도 기뻐해 주세요.”     



멀리 떨어져 혼자 지내는 자신을 행여 걱정이라도 할까 봐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현실에서는 끝내 이룰 수 없었던 가족과의 재회를 향한 염원을 담은 이 편지화는 네 사람의 환한 웃음과 달리 보면 볼수록 애틋하다. 이중섭의 편지화는 전시장 가장 깊숙한 곳에 ‘이중섭의 사랑과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마련된 특별한 공간에서 이중섭의 엽서화 6점과 함께 만날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해봐야 할 서울미술관의 새 소장품은 이우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2020년 작 <대화 Dialogue>다. 사실 미술을 꽤 오래 취재해오면서 이우환의 작품이 좋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미술시장에서 이우환이 블루칩 작가가 된 지가 도대체 언제인가. 시장이 하염없이 곤두박질칠 때도 이우환만큼은 흔들림 없이 건재했다. 어떤 작품이든 나오는 족족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하지만 ‘좋은 것’이 ‘비싼 것’인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이우환의 작품 가운데 내게 와 닿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자마자 단숨에 매료되고 말았다. <대화>라는 제목처럼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만나 서로에게 스며드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이 그림은 형상으로 보나 색감으로 보나 지금까지 보아온 이우환 특유의 단정하고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과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음과 양이든, 하늘과 땅이든 감상자가 보기에 따라 다양한 연상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빨강과 파랑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시각적인 쾌감까지 선사한다. 이우환의 대표작으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서울미술관 설립자 안병광 회장이 이 그림을 품은 이유를 알겠다.     



전시장 한쪽에는 1969년 이우환이 선배 화가 이세득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1968년 7월 19일부터 9월 1일까지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한국현대회화전’이 열렸는데, 내로라하는 한국 작가 20명이 대거 참여한 이 전시에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이우환도 참가했다가 다른 작가들로부터 상당한 비난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이우환은 편지에서 “저를 앞에 두고 직접 호령하는 선배도 있었고 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는 그런 그림 집어치우라고 근대미술관 모 씨에게 청원을 올린 작자도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서글프고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토로했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편지 원본은 현재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소장품으로, 2016년 ‘작가가 걸어온 길-화가와 아카이브’ 전에서 공개된 바 있다.     



아울러 추사 김정희의 글씨 <주림석실 행서대련>(19세기), 정상화의 <무제 12-5-13>(2012) 등이 서울미술관의 새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됐다. 사실 서울미술관의 주요 소장품들은 그동안 전시를 통해 여러 번 선보였기에, 나 또한 두 번 세 번 그 이상 실물을 직접 본 작품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볼 때마다 작품 수준에 놀라게 된다.     



서울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작품은 사임당 신 씨의 <초충도>다. 본래 한 화첩으로 제작됐다가 어느 시점에 낱장으로 분리돼 지금은 10점이 모두 액자로 꾸며졌다. 최고급 한지인 감지에 수박, 오이, 맨드라미, 꽈리, 잠자리 등 이 땅의 동물과 식물들을 고운 채색으로 그려 넣은 조선 중기 회화의 명품 중의 명품이다. 사임당 특유의 섬세한 표현이 그림마다 빛을 발한다. 널찍한 타원형 전시 공간 하나가 오직 <초충도> 10점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천경자 <고>(1974)
김기창 <미인도>(연도미상)


 

장욱진, 김기창, 천경자, 이대원, 유영국, 김환기 등 다른 화가들의 작품 역시 대표작 목록에 집어넣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좋은 작품이 많다. 좋은 작품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상당한 면적을 자랑하는 서울미술관 2층 전체를 몇 개 섹션으로 나눠 그림을 충분히 여유 있게 건 덕분에 전시의 서막을 여는 김정희의 글씨부터 대단원을 이루는 이중섭의 편지화까지 가만히 전시장을 돌다 보면 안구가 어느새 정화된다. 소장품만 가지고도 이렇게 훌륭한 전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피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대원 <배꽃>(2000)
유영국 <움직이는 산>(1980)


전시 정보

제목서울미술관 소장품전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기간: 2024년 11월 3()까지

장소서울미술관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11길 4-1)

문의: 02-39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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