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05) 전영백 <세잔의 사과>(한길사, 2021)
이 책은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예술을 당대의 중요한 사상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 지그문트 프로이트, 조르주 바타유, 질 들뢰즈, 자크 라캉, 모리스 메를로퐁티, 그리고 앙리 베르그송 7명의 이론에 접목해 분석한다. 2008년에 나온 초판을 2021년에 개정하면서 앙리 베르그송에 관한 장을 추가해 내용을 확장했다.
세잔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이 연구되는 화가다. 처음에는 세잔도 인상주의자였다.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단체전에 <목 매달아 죽은 이의 집>과 <모던 올랭피아> 등 석 점을 출품했다. 이 가운데 <모던 올랭피아>는 가장 인상주의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하지만 세잔은 인상주의의 자장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예술 세계로 묵묵히 나아갔다. 재현과 결별함으로써 피카소의 형님이 됐고, 색채의 마법을 실현함으로써 마티스의 형님이 됐다. 세잔을 ‘가장 지적인 화가’라 부르는 이유다.
세잔은 일찍이 자신의 미학적 목표가 “감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화가에게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눈과 정신인데 이는 각각 서로를 보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양자를 상호적으로 발전시켜가면서 작업할 필요가 있다. 눈으로는 자연을 봄으로써, 그리고 머리로는 조성된 감각의 논리로써 작업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표현의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세잔의 그림은 어느 노래 가사처럼 ‘그리다 만 그림’이다. 한두 작품이 아니라 상당수가 ‘미완성 같은 완성작’이다. 세잔의 예술을 단적으로 요약하면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린 인물화, 먹지 못하는 과일을 표현한 정물화, 그리고 접근할 수 없는 장면을 보이는 풍경화라 할 수 있다. 세잔의 그림에 보이는 애매함(ambiguity)은 당혹스럽다. 세잔의 그림은 불편하고 긴장감을 자아내는 수수께끼 같은 시각 구조를 지녔다. 익숙하지 않은 세계여서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세잔의 그림은 낯설다.
“메를로퐁티는 ‘낯설음’의 느낌이 세잔 회화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감정이라 했다. 그러면서 이 낯선 느낌은 세잔이 아니었으면 볼 수 없는 상태로 남겨졌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래서 세잔도 처음에는 ‘병에 걸린 눈을 가진 작가’라는 모욕적인 비난을 들었고,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통탄할 실패’이자 ‘프랑스 미술을 모욕하는 쓰레기’라며 사정없이 깎아내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세잔이라는 화가가 오늘날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칭송받는가. 단적으로 세잔은 다른 화가들과 보는 방식(way of seeing)이 달랐다. 그는 그때까지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모두가 믿은 관습, 클리셰를 거부했다. 단 하나의 윤곽선이라는 관습을 포기했고, 원근법과도 과감하게 결별했다.
“대체로 미술사의 대가들은 전통적인 계보를 참조하여 아방가르드적 ‘차이’를 창출해내는 데 성공한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미술사의 정통과 어떻게 관계하면서 개별적인 창작을 제시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요컨대, 창작성이란 두터운 전통의 관습을 뚫고 새로움을 표현해내는 것이다.”
실제로 세잔의 드로잉 가운데 3분의 1이 다른 작가의 모사라고 한다. 세잔에게도 출발은 전통이었다는 것. 세잔 또한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리얼리티’를 목적으로 삼았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기존의 방법론을 스스로 부정했다. 세잔은 ‘무엇을 채울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비울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성글다. 저자는 “회화면의 유동성과 더불어 그 미완의 상태는 이 시기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림의 고정된 완성을 피하려 했던 것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인상주의부터 본격화된 것이라 볼 수 있는 모더니즘 회화의 핵심은 평면성이다. 이에 비해, 원근법의 시각적 깊이와 공간감을 강조하는 고전미술에서는 깊이감이 핵심이다. 사실 이 양자는 공존할 수 없는 표현방식이다. 그러나 세잔의 그림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이 표현방식이 그만의 언어로 훌륭하게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세잔은 재현에서 추상으로, 내러티브에서 색채 효과로, 그리고 두텁고 웅크린 색채 표면에서 공기가 통하듯 얇고 여유로운 평면화로 나아갔다. 흔히 거론되는 세잔 회화의 특징은 ‘깊이가 있는 평면성’이다. 묘한 역설이다. 즉흥적이면서 견고하게 그렸다는 것.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잔은 ‘시간의 이미지를 나타내려 한 최초의 화가’로 평가된다. 세잔 하면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생빅투아르 산 풍경화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저자는 이렇게 안내한다.
“풍경이 새로 조성되는 것인지, 아니면 차츰 스러져가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양극단이 결국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듯, 이 풍경 이미지들은 그 중간에 아스라이 걸려 있다. 그리고 그 회화의 막에서 양극단은 연결되어 하나로 통합된다. 그렇듯 세잔회화가 보여주는 풍경-유기체의 전체성은 풍경(객체) 자체의 유기적 순환과 그 유동성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 세잔이 그린 생빅투아르 산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표면의 붓터치와 줄일 수 없는 거리 끝에 자리 잡은 생빅투아르 산 사이의 넉넉한 공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세잔이 왜 ‘먹을 수 없는 사과’를 그렸는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당대의 유명한 소설가 D H 로렌스의 말을 들어보자.
“현대의 프랑스 미술은 세잔으로 인해 실제적 물질로, 즉 대상적 물질로 향하는 첫 번째 작은 발걸음을 뗐다. … 세잔의 사과는 사람의 감정과 사과를 섞지 않으면서 사과가 분리된 실체 자체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진정한 시도다. 세잔의 위대한 노력은, 말하자면 사과를 그로부터 떼어내어 그것 자체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는 겉으로 보아 작은 일인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인간이 수천 년 만에,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려는 진정한 첫 징조인 것이다.”
세잔은 넉넉한 가정 형편 덕에 평생 돈에 쪼들리며 그림 팔 궁리를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그것이 세잔의 빛나는 성공을 뒷받침한 밑거름이라고 속단해선 안 된다. 그의 경제적 여건은 그의 예술적 분투와는 별개다. 찢어지게 가난했다면 이루지 못했으리란 가정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세잔은 자기 생활의 조건과 상관없이 평생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려 분투했다. 죽는 날까지 스스로에 대한 자각적 회의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색채의 대비라는 자기만의 방법을 통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란 것을 예술로 보여줬다. 특히 세잔은 푸른색의 사용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이뤄, 한 미술평론가는 이렇게 말했을 정도다. “세잔의 푸른색은 사물의 근본적 존재와 그 핵심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본질적인 영원성을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위치시킨다.”
사실 도판으로 봐선 책의 내용에 충분히 공감하기 어렵다. 자고로 그림은 직접 봐야 한다. 그러므로 세잔 예술의 진면모를 알려면 그의 그림 앞에 서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기회가 오길 간절히 기다린다. 저자 말마따나 말이 나타내지 못하는 부분을 그림은 표현한다. 이때,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얻는다.
“시각미술이 일반적으로 공간적이고 동시적이긴 하다. 그러나 미술작품 중에는 이를 넘어 시간적이고 연속적인 작품이 있다는 것, 적어도 그러한 시도를 한 작가들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될 때 통쾌한 미적 자유를 느끼게 된다. 세잔은 그러한 작가들 중 선두주자였고, 그의 회화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생각에 의심을 품고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한국의 서양미술 연구자가 이토록 훌륭한 책을 쓸 수 있다니. 게다가 저자의 첫 책이라는 점이 더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