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18) 성북구립미술관 <조덕환: 구상의 길을 걷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도록을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이쾌대가 운영한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운 화가 가운데 신영헌과 조덕환이 6․25전쟁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작품을 남겼다는 내용과 함께 신영헌의 <평양 대동교의 비극>(1958)과 조덕환의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그 참모들>(1953)의 도판이 나란히 실린 것. 두 작품 모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6․25전쟁을 다룬 미술사적 증언으로는 ‘고바우 영감’으로 잘 알려진 김성환 화백의 스케치 105점이 단연 압도적이다. 구본웅, 이종무, 이수억, 이응노 등 여러 화가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풍경을 그려 남겼다. 이 그림들은 예외 없이 화가가 서울의 거리에서 직접 목격한 상황과 광경을 사생한 결과물이다. 그런 면에서 조덕환의 그림은 아주 특별하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1952년 12월 4일 경기도 광릉 수도사단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약속대로 한국을 찾은 아이젠하워는 이승만과 함께 경기도 광릉 수도사단에서 기갑부대 기동과 포 사격 훈련을 참관했다. 당시에 촬영된 흑백사진이 현장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조덕환은 어떻게 이승만과 아이젠하워가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모습을 그릴 수 있었을까.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명은 이렇다.
“조덕환(1915-2006)의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그 참모들>(1953)은 1952년 11월에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한국전쟁 조속 종식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대로, 즉시 한국을 방한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전선을 시찰했던 광경을 사실적인 기록화로 그린 역작이자 대작이다. 이 생생한 6∙25전쟁 기록화를 그릴 당시 작가 조덕환은 육군본부 문관이었고, 당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이 위촉했던 것이라 한다.”
이승만과 아이젠하워의 만남을 군 소속의 사진사가 찍었을 것이고, 이 역사적인 장면을 기념하고자 나중에 조덕환에게 그리게 했을 것이다. 조덕환은 명실공히 일본 유학까지 한 화가였기 때문이다. 조덕환은 여러 사진 가운데 적당한 것을 하나 골라 세로 91cm, 가로 116.8cm에 이르는 커다란 화폭에 정성을 다해 그렸을 것이다. 도판 이미지만 봐도 화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그렸는지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이충렬 작가의 책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김영사, 2011)에도 소개됐다.
어떤 화가는 그림 한 점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도 한다.
바로 그 조덕환의 그림을 큰 규모로 선보이는 전시가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조덕환 화백의 유족이 올해 성북구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191점 가운데 90여 점을 골라 선보인다. 3층 전시장에서는 인물화, 2층 전시장에선 풍경화와 정물화를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무난하고 평범한 그림들이지만, 자화상 하나는 아주 특색이 있다. 풍경화 가운데선 경복궁 근정전을 그린 1979년 작 <고궁>이 눈에 띈다. 당시 화가들은 넓은 시야로 건물을 화면 중심에 놓고 주변 환경까지 같이 그리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조덕환의 <고궁>은 특이하게도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한 채 클로즈업하듯 건물을 바짝 당겨 그렸다.
아울러 성북회화연구소 시절 조덕환이 그린 데생 8점 가운데 4점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성북회화연구소 관련 자료와 작품이 6․25 전쟁으로 대부분 사라졌기에 당시를 증언하는 더없이 귀중한 자료다. 성북회화연구소는 조덕환이라는 잊힌 화가를 한국 미술사와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다. 그러므로 조덕환의 작품이 성북구립미술관으로 간 것은 당연지사.
기증만 잘해도 이름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