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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석연, 천경자, 그리고 샤갈의 눈부신 명작

석기자미술관(233) 서울옥션 11월 미술품 경매 프리뷰

by 김석


자화상.png 원석연의 자화상



■‘연필 화가’ 원석연의 <개미>


‘연필주의’라는 표현이 허락된다면 원석연(元錫淵, 1922~2003)이라는 화가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 달리 있을까. 과거 KBS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달인>의 주인공은 고작 16년을 바치고도 버젓이 달인 행세를 했더랬다. 하물며 원석연은 60여 년 동안 오로지 연필로만 그림을 그리다 갔으니 그 말의 뜻에 부합하는 진짜 달인(達人)이요 대가(大家)라 할 것이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고 돌아온 원석연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미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석연은 처음부터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월급 받는 직장이라곤 미 공보원 미술과 근무 이력이 전부고, 공모전에 작품을 낸 것도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원석연이 평생에 걸쳐 꾸준히 한 일이라곤 연필로 그림 그리고 개인전을 연 것뿐이었다. 그룹전이나 단체전에도 일절 출품하지 않았다. 한국 미술계에 일찍이 있어 본 적 없는 별종(別種)이었다.


“연필의 선에는 음(音)이 있다. 저음, 고음이 있고, 슬픔도 있고 즐거움도 있다. 연필선에도 색(色)이 있고, 색이 있는 곳은 따사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기쁨도 있다. 고독도 있고. 연필선에는 무한한 색이 있으며 보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연필화의 선은 리듬이 있고, 마무리가 있다. 그리고 생명이 존재한다. 시(詩)가 있고 철학이 있다. 선 하나하나에서 흐르는 리듬, 연필화의 선에는 우주를 뒤흔들 수 있는 힘과, 반대로 조용한 물같이 잔잔할 때도 있듯이, 선의 조화를 이룬다.”


원석연은 ‘개미 화가’로 불린다. 196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발표한 개미 그림으로 일약 유명해졌기 때문. 연필그림이라고 얕잡아 보면 오산이다. 원석연은 우리가 흔히 드로잉 하면 떠올리는 작은 스케치가 아니라 100호, 200호가 넘는 연필화 대작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고로 개미는 부지런함의 상징. 근대화 달성이란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그림 속 개미가 새 시대의 일꾼을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바람에 원석연의 그림은 군사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20251117_122649.jpg 원석연, <개미>, 종이에 연필, 67.3×103.8cm, 1971



원석연의 그림이 경매에 나왔다. 그동안 원석연의 그림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 한 점이 나와도 반드시 봐야만 했다. 서울옥션 11월 경매에 나온 원석연의 <개미>(1971)는 세로 67.3cm, 가로 103.8cm로 그다지 크지 않은 그림이다. 보관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던 듯 종이가 누렇게 변색했고, 아마도 처음 상태 그대로일 나무 액자는 여기저기 낡아서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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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 대각선 방향으로 몰려가는 개미 떼를 화면에 균일하게 그려 넣었다. 원석연의 개미는 도판으로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 실제로 보면 개미 한 마리가 새끼손가락 두세 마디에 상당할 만큼 꽤 크다. 개미 떼가 움직이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오래 골똘히 관찰하고 그린 까닭에 생동감이 살아 있다.


다리와 더듬이를 보면 일필휘지로 그은 듯 거침이 없다. 한 마리도 안 빼놓고 그림자까지 일일이 그려 넣었다. 그저 감탄만 나온다. 연필 한 자루로 이만한 조형 세계를 연 화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그러니 원석연을 ‘연필 원리주의자’라 불러야 마땅하리라. 화면 오른쪽 아래 이름과 연도를 적었다. 추정가는 1천만 원에서 2천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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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인 채색화가' 천경자의 <여인>


2025년은 천경자 화백 작고 10주기가 되는 해다. 이 뜻깊은 해를 맞아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가 9월 24일(수)부터 내년 1월 25일(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열린다. 2006년 갤러리현대가 개최한 천경자 생애 마지막 전시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이후 20년 만에 열리는 가장 큰 규모의 천경자 전시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천경자 화백의 주요 작품 8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을 뿐 아니라 저서, 도서 장정, 화가의 성장 과정과 작품 제작 과정, 여행기 사진과 편지 등 다양한 자료를 함께 소개한다. 천경자가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채색화가라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하게 해주는 중요한 전시다. 이만한 규모의 천경자 전시는 다시 보기 쉽지 않다.


20251117_122626.jpg 천경자, <여인>, 종이에 채색, 26.7×23.7cm



천경자의 그림이 경매에 나왔다. 천경자의 그림이 경매에 나온 것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작품 가격이 탄탄하게 형성돼 있어서 거래가 비교적 잘 되기 때문에 지금도 경매에 꾸준히 한두 점씩 나온다. 이번에 출품된 천경자의 <여인>은 세로 26.7cm, 23.7cm로 작지만, 천경자 그림의 매력을 듬뿍 담은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천경자의 그림엔 태작이 없다.


경매사 담당자에게 들으니, 어느 시인이 지인에게 선물로 준 걸 물려받아 고이 간직해온 자제분이 경매에 내놓은 거라 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소개되거나 전시된 적 없는 천경자의 미공개작이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서명을 적었다. 제작 연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추정가는 9천만 원에서 1억 5천만 원.


■샤갈의 명작은 경매 최고가를 다시 쓸 수 있을까?


서울옥션이 11월 경매를 작심하고 준비한 모양이다. 국내 미술품 경매에선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이틀 내리 경매를 채택했다. 원석연과 천경자의 작품은 경매 둘째 날인 11월 25일(화) 오후 4시에 진행되는 <컨템포러리 데이 세일 Contemporary Day Sale>에 출품됐다. 그리고 하루 전날인 11월 24일(월) 오후 7시에 서울옥션이 준비한 회심의 <이브닝 세일 Evening Sale>이 열린다. 이틀 동안 거래될 출품작 총액이 자그마치 290억 원어치에 이른다. 2008년 이후 국내 미술품 경매로 최대 규모다.


20251117_121225.jpg 마르크 샤갈, , 캔버스에 유채, 100.4×73.2cm, 1937



출품작 수가 많지 않은 이번 경매의 총액 규모가 290억 원에 육박하는 건 경매에 출품된 샤갈의 그림 넉 점 가운데 두 점의 낮은 추정가만 합쳐도 무려 154억 원으로 총액의 절반이 넘기 때문이다. 샤갈의 그림 넉 점이 한꺼번에 국내 경매에 나온 것 자체가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관심을 끄는 작품은 샤갈의 1937년 작 <Bouquet of Flowers>다. 세로 100.4cm, 가로 73.2cm로 샤갈 작품으로는 크기가 상당하고, 샤갈의 대표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잘 알려졌다시피 샤갈은 평생에 걸쳐 ‘사랑’이라는 주제를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에도 어김없이 변함없는 사랑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샤갈 부부가 중력을 거슬러 화려한 꽃다발을 배경으로 끌어안은 모습이 그려졌다. 오른쪽 뒤편에 작게 보이는 마을은 샤갈의 고향인 러시아 비테프스크의 풍경이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 새로운 삶을 꾸려가던 샤갈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고향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샤갈 블루’의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추정가는 94억 원에서 150억 원.


20251117_194034.png 기존 최고가 기록을 가진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이제 관심은 과연 이 작품이 국내 경매 사상 서양 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울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한국 경매회사가 거둔 서양 미술품 최고가 기록은 2008년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판화판, 거울, 과일이 담긴 그릇의 정물화>가 세운 100억 7천만 원이다. 시장이 한창 호황이던 시절에 그것도 홍콩 경매에서 거둔 성적이란 점을 고려할 때, 샤갈의 작품이 17년 만에 순수 국내 경매에서 해외 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새로 쓴다면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20251117_121238.jpg 마르크 샤갈, , 캔버스에 오일과 템페라, 131.5×162.3cm, 1978



또 다른 출품작 <Paris Landscape>는 샤갈이 앞선 작품으로부터 41년이 지난 1978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세로 131.5cm, 가로 162.3cm로, 크기는 오히려 앞의 작품보다 더 크다. 그림 내용은 제목이 알려주듯 파리 풍경이다. 1966년 프랑스 남부 생폴 드 방스로 이주한 샤갈은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아서 선명한 색채를 발견한다. 화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린 샤갈은 이 시기에 과거보다 한결 밝고 온화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샤갈이 즐겨 사용한 푸른색이 흰색과 서로 스며든 화면에 서커스 단원들과 공중그네 곡예사, 당나귀 위의 반인반수 곡예사, 유대교를 상징하는 촛대를 든 인물이 곳곳에 등장해 신비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화면 아래에 센강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파리 시내 전경이, 화면 오른쪽 위로는 샤갈 예술의 뿌리가 된 고향 비테프스크 마을이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 샤갈 부부가 자유롭게 파리 시내를 날고 있다. 샤갈이 즐겨 그린 도상이 빠짐없이 들어간 만년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추정가는 60억 원에서 90억 원.


20251117_121254.jpg 마르크 샤갈, , 41.1×32cm, 메이소나이트에 템페라, 1981
20251117_121312.jpg 마르크 샤갈, , 59.3×49cm, 메이소나이트에 템페라, 1982



■경매 정보

이브닝 세일: 2025년 11월 24일(월) 오후 7시

컨템포러리 데이 세일: 2025년 11월 25일(화) 오후 4시

프리뷰: 당일 경매 시작 전까지

장소: 서울옥션 강남센터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864)

문의: 02-39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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