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ㅇㅅㄷ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atre Romance Dec 31. 2020

아빠의 세 번째 퇴직

사실 여전히 걱정돼.

'카톡'


엄마다. 캐나다에 있으면서 점점 더 날짜 감각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엄마'라는 두 글자를 보자마자, 헉! 새해인가 벌써? 새해 전화도 안 드려서 카톡이 오신 건가! 싶어 황급히 메신저를 열었다.


'아빠가 이제 퇴직하니 많이 섭섭해하는 것 같아

축하? 위로?

하여튼 전화해드려라

지금 산에 갔어'


아, 맞다. 아빠의 퇴직이다. 세 번째 퇴직. 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마지막 퇴직이 될 수도 있겠으나 또 모르겠다. 내가 아는 울 아빠는 가만히 있는 걸 못하는 사람이라. 이제 정말 정년퇴직을 해야 하는 나이이시기에 직장 생활은 못하실지 모르겠지만, 또 뭔가 일을 벌이실지도.


아빠의 첫 번째 퇴직은 30년 넘게 근무하셨던 군무원으로서의 공직생활이었다. 사실, 아빠는 40년 가득가득 다 채워 명예롭게 같은 군무원으로서 정년퇴직하신 엄마보다 몇 해나 이르게 퇴직하셨다. 아직까지도 왜 정년을 채우지 않고 남들보다 조금 이르게 퇴직하셨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그 때 당시에는 내가 모르는 아빠의 사회생활에 대해 섣불리 짐작하기도 조심스러웠거니와 갑작스럽게 퇴직 소식을 들어버려서 '왜 이렇게 빨리 퇴직하시지?' 하는 약간의 원망 어린 마음과, '퇴직을 하면 아빠의 삶은 어떻게 되지?'라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여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런 게, 두 분 다 20살 초반부터 군무원으로 재직하셨고, 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내가 아는 아빠와 엄마는 늘 '직업'을 가지고 계셨기에 '직업'이 없는 아빠와 엄마는 어떤 것일지 짐작할 수도 없었고, 때문에 아빠의 빠른 퇴직은 나에게 너무 혼란스러운 사건이었다.


아빠의 퇴직 소식을 들었던 순간이 여전히 생생하다. 2호선 사당행 열차에서 일 년에 한두 번 통화할까 말까 한 친오빠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아빠 퇴직하신다'


일 년에 한두 번 통화하는 사이답게 간단명료한 사실만 전했다.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왜? 언제? 갑자기?라는 말을 쏟아내는 나한테 오빠는 그냥 그렇다더라 라고만 이야기했다. 나는 처음에는 화가 났다. 왜 나에게는 아무도 언질을 주지 않은 거지? 나는 가족이 아닌가? 왜 나에겐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의논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났다. 지하철에 서서 출입구 문에 이마를 박고 혼자 훌쩍이며 울고 있자니 더 화가 났다. 그런데 갑자기 '화'가 왜 나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이게 '화'가 나서 나는 눈물인지도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 사실 아빠가 나에게 본인의 퇴직을 '의논'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빠는 어른이었고, 이미 험난한 세상을 많이 살아오신 분이었다. 혼란스러운 마음과 이상하게 솟구쳐 오르는 '화'를 참고 눈물이 나는 이유를 찾기 위해 다시 잠잠히 내 안을 들여다보니, '화' 뒤에는 '이기심'이 있었다.


 내 기준에서 아빠는 퇴직을 하시기엔 젊으셨고, 나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원하던 극장에서 인턴을 시작한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조무래기였다. 그때 당시 인턴 월급은 120만 원.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그 때 당시의 나는 엄마 아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할 수도 없는 어린애였다. 그래서 겁이 났던 거다. 엄마 아빠가 돈을 벌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지? 나는 내가 좋아 예술판을 선택했었고, 내가 알고 좋아하는 이 예술 바닥은 먹고살만한 돈을 벌기는 애초에 글러먹은 곳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이기심 가득한 마음들이 퇴직 후 공허해질 아빠를 먼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위부터 먼저 걱정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화'가 나서 났던 눈물에 내 이기적인 마음이 겹쳐버렸다. 나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고 결국 어디에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는 혼란스러운 마음까지 겹쳐 지하철에서 오열을 했었다. 아빠에 대한 미안함, 분노,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 갑자기 이 험난한 세상을 혼자 살아가야 할 것만 같은 두려움. 모든게 엉커버렸던 마음. 이게 아빠의 첫 번째 퇴직에 대한 기억이다.


아빠는 역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퇴직과 함께 훌쩍 여행을 떠나셨다. 아빠의 첫 여행은 몽골이었던가. 한 번도 해외여행을 제대로 해 보신 적이 없는 아빠가 혼자 여행을 간다기에 온 가족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아빠가 컴퓨터를 다룰 줄 안다는 사실 자체에도 놀라웠는데 몽골 여행 커뮤니티에서 여행 일행을 구해 장기 여행을 떠나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제대로 된 첫 해외여행을 떠나는 아빠에게 아빠 돈으로 온 유럽을 돌아다니며 여행했던 것이 미안하고 죄스러워 몽골 여행에 대한 정보도 찾아 알려드리고 여행책이나 별자리 책 등을 사다 드렸었다. 다행히도 아빠는 한 달간 안전하게 몽골 여행을 다녀왔고, 나중에 들어보니 함께 했던 일행은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만한 브랜드의 회장이시랬던가. 아들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준 후 수십 번 몽골 여행을 다녀오신 분이었다고 한다. 부자 동행 덕에 아빠는 돈도 거의 안 쓰고 한국말도 잘하는 몽골인 가이드를 전용으로 고용해 알찬 여행을 다녀오셨었다.


이후 아빠는 혼자, 또 친구분들과 같이 온 동남아시아를 휩쓸며 미얀마부터 시작해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까지 알차게 약 두 달간 자유 여행을 하고 돌아오셨고 틈틈이 엄마의 휴가와 맞춰 패키지여행도 다녀오셨다. 동남아 일주 중 라오스에서였던가, 내 또래의 젊은 여행자들과 물축제에서 같이 물총 싸움도 하고 저녁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눠서 내 생각이 많이 났다는 연락을 받았던 게 기억에 아직 남아있다. 물론 나는 아빠한테 '그 친구들한테 당연히 저녁은 사줬지?'라고 먼저 물으며 혹시나 '꼰대'아저씨는 아니었을까 걱정했던 나쁜 딸이었지만.


여행을 어느 정도 다녀오신 아빠는 또 가만히 있질 못했다. 실업급여가 다 떨어지셨는지 (ㅎㅎ) 갑자기 취업을 하신다는 것이었다. 아빠의 두 번째 직장은 학교였다. 천안의 모 공고에서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을 선택하는 학생들에게 취업 자리를 알아봐 주고 인터뷰를 잡고, 그 과정들을 도와주는 업무였다. 나는 평생 군무원으로 큰 부대에서 군 무기나 군용 차량, 탱크 같은 것들을 다루다 어떻게 저런 일을 하실 수 있지? 어떻게 취업이 가능.. 한 거지? 라며 모든 점이 의문스러웠지만 아빠는 약 3년간 두 학교에서 잘 근무하셨고, 이후 또 조금 쉬고 싶으셨는지 재계약을 못 따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두 번째 퇴직을 하셨다. 그때 아빠는 가끔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취업해 다행이라는 말을 하셨다.


아빠의 세 번째 직장은 수도시설사업소였다. 공공기관에 공무직으로 취직이었다. 여전히 이렇게 취직을 잘하는 아빠가 여전히 의문스러웠지만, 어찌 되었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빠가 취직을 해서 다행이었다. 아빠는 그때 함께 면접을 봤던 친구들이 내 또래로 젊었었고, 젊은이의 자리를 뺏은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술에 취해하셨다. 그때 당시 나도 공공기관 극장에서 공무직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니, 아마 그때 아빠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취직하기 어려운지를 몸소 이해하고, 그 문제의 원인이 아버지 세대에 적지 않아 있다고 생각하셨던 듯하다. 공무직으로 근무하는 동안 아빠는 종종 흔히 '공무원들이 다 그렇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근무태만(?)을 보이셨지만 그럭저럭 공공기관에서의 업무에 적응을 너무 잘(?) 하신 듯 보였었다.


12월의 마지막 날. 내일이면 아빠의 세 번째 퇴직이다. 아빠는 '휴식'도 '일'로부터 휴식이어야 진정한 휴식이지, 매일이 휴식이면 그건 휴식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보통의 아버지가 그러하듯, 나의 아빠도 평생 일만 해오신 사람이기에 영원한 '휴식'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공허함, 외로움에 많이 힘드셨을 거다. 우스개 소리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우리 아빠'로 표현했지만, 아마 아빠의 안에는 '가장'으로서의 존재감, '노동'을 함으로써 실현해왔던 본인의 가치,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의 역할 등에 대한 고민으로 퇴직 후 수도 없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셨을 테니까. 나는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빠와 너무 똑 닮은 딸이다. 아빠를 닮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외롭지 않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또 나는 나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노동'을,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고 늘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아빠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안다.


퇴직을 축하하기 위해 아빠한테 영상전화를 걸었다. 말은 안 하고 계시지만 주름진 미간에 고민이 가득하고 말과 말 사이에 한숨이 들어있다. 내년 봄에는 이제 엄마도 퇴직하셨으니 제주에서 두세 달쯤 살아보기를 할까 고민이시란다. 역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울 아빠. 깊게 파인 미간에 괜스레 마음이 아파오지만, 그래도 나는 아빠의 인생 2막을 응원한다. 첫 퇴직으로 몇 해 전에 시작하실 줄 알았던 인생 2막, 이제 정말 다시 제대로 열리시길! 박 사장님 파이팅!


매거진의 이전글 펜트하우스에서 깨달은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