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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벤더핑크 Nov 13. 2021

구스타프 클림트, 황금빛 물결

재연된 큐레이터의 꿈


한 때, 큐레이터의 꿈을 가진 적도 있었다.

예쁜 그림을 실컷 볼 수 있는 선이 아름다운 미술관에서 매일매일 시간을 보낸다면, 왠지 나도 그림에 취한 날들에 그저 행복할 것만 같았다.


사실, 화가가 주연이라면 큐레이터는 조연이다.
아니, 카메라 화면에 보이지 않는 무대 연출가 정도 되겠다.


    이상과 동경의 공간이었던 미술관으로 출근이라도 하듯, 서울 출장 등으로 서울행을 하는 날이면 틈나는 시간을 쪼개 자석처럼 끌리는 전시회를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 전시회였다. 나는 그전에는 미처 나도 몰랐던, 부정할 수 없는 뼛속 깊이 자본주의의 노예였던 건지 전시회를 뒤덮은 금빛이 마냥 그렇게도 좋았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한 영롱한 금빛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마저도 황금빛으로 가득 차 풍요로워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클림트는 세공업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실제 황금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 '키스'로 많이 알려진 클림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색채와 색감이 무척 아름답다.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과 '생명의 나무'


    클림트의 작품들은 아름다운 색채를 품은 만큼 여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사실 클림트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들에게 우호적인 삶을 산 것 같지는 않다. 56살로 죽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호색한으로 염문을 뿌려온 클림트. 그의 습작에 등장하는 많은 나체의 여인들을 클림트의 연인이었고 바람둥이의 삶으로 여성들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을 듯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여성을 아름답게 표현한 화가 중 하나인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키스'란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천하의 바람둥이였던 그가 유일하게 품은 순수한 사랑의 진심이 온전히 이 그림에 절실하게 녹아들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에로티시즘이 없던 당시 포르노 화가로 매도되어 당시에는 인정을 못 받고 사후 재평가받았던 화가로, 원래 육체적 관계 속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클림트의 동생과 에밀리의 언니가 결혼하면서 사돈으로 처음 만난 둘. 클림트는 에밀리에게도 누드화의 모델이 되어달라 부탁한다. 그는 그녀에게 여느 여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됐고, 하루 종일 에밀리에 대한 생각만 하게 된다. 그는 에밀리에게 400통이 넘는 엽서를 보냈고 두 사람은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며 사랑의 감정을 키웠다고 한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 상 육체적인 관계가 아닌 정신적인 사랑이었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 그림과 실제 에밀리와 클림트의 사진

   천하의 바람둥이인 구스타프 클림프도 그녀 앞에만 서면 말 한마디 못하는 숙맥이 되었다. 그림을 그릴 때조차도 자신의 화풍을 펼칠 수 없었다. 그가 그린 에밀리의 그림은 관능적이기는커녕 수수하고 평범한 모습이었다. 결국 그는 에밀리 몰래 다른 여자들을 만나며 영감을 얻기 시작했고 다시 관능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가 다른 여자들과 있는 장면을 목격한 에밀리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결국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키스'

   에밀리가 떠난 후, 클림트는 2년 동안 한 그림에만 몰두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키스’였다. 위험한 낭떠러지 끝에서 키스하는 두 남녀의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을 통해 에밀리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이후 구스타프 클림트는 에밀리에게 그림으로 진심을 고백했고 에밀리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 정신적 지주이자 친구로 27년간 함께 보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의 임종의 순간을 지킨 사람은 에밀리뿐이었다. 바람둥이 같던 클림트에게 순수하면서 지고지순한 플라토닉 사랑이라니 참 의외의 모습이다.


   그림이 매력적인 것은 바로 그림을 통해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엿보게 되는 순간이다. 그림을 매개로 몇 백 년 전 살다 간 한 사람을, 그림을 보며 당시 그 사람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시, 공간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지금 내가 마주할 때, 그림에 대한 감상은 더욱 짙어지는 느낌이다. 그림은 마치 하나의 의사소통 수단이 된 것처럼 작가의 생각과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작품을 통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오래전 머나먼 땅에 살다 간 사람을 만나볼 수 있다니, 또 한 사람의 삶의 발자취를 맛볼 수 있다니 한편으로 참 신비로운 경험이기도 하다.




 '유디트'

   전시회에서 특히 인상에 남았던 또 하나의 작품은 유디트란 그림이다. 그림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액자마저도 원래 클림트가 픽한 그대로의 것이라 한다.


   그러나 마을을 구하기 위해 적장을 유혹해 목을 밴 여인으로 유명한 유디트를 남자들도 하기 힘든 일을 해낸 용감한 장수와 영웅의 느낌으로 표현하거나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해야 했던 무거운 숙명을 지닌 여인으로 표현한 당시 대부분의 작품과 다르게 클림트의 유디트는 무척 팜므파탈적이며 눈빛이 뇌쇄적이기까지 하다. 목과 허리에는 황금빛 밴드로 그녀가 어디엔가 묶여 있음을 암시하고 있고, 손에는 적장의 목이 들려져 있다. 가녀린 여성의 몸인 그녀가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삶의 무게와 번뇌는 무시한 채 그저 유디트를 성적인 욕망과 유혹의 존재로만 표현한 클림트. 그렇게 여성에 대한 이해를 쏙 빼놓은 채 성적 대상으로만 승화시킨 클림트가 다소 얄밉기도 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그의 실력으로 그림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클림트의 전시회에는 인물화, 드로잉과 습작, 풍경화 등 몇 가지 섹션에 있었고, 섹션을 옮길 때마다 해당 파트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한국어와 영문으로 나란히 적혀 있었다.   


  클림트는 주로 여성의 인물화로 유명하다. 하지만, 미술관에는 드로잉의 습작도 꽤 많이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색채의 마술사 같은 클림트의 작품에서 색채를 쏙 빼고,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날 것의 선들의 집합체인 드로잉도 꽤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걸음 한걸음 옮겨가며 구경하다 마침내 풍경화 부분으로 넘어가면, 인물화로 유명한 많은 클림트이지만, 의외로 꽤 많은 풍경화들이 있음에 놀란다. 무지한 내 눈에는 나름 느낌 있어 보였는데, 그러나 큐레이터의 눈은 달랐던 모양이다.

'사과나무' '캄머성의 공원길' '아터제 호수의 릿츨베르크'

 

     영어로 적힌 풍경화에 대한 설명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혀있었다. 십 년도 더 된 오래전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Landscape painting, which pleased no one but himself, ~~~


     no one but은 '이외의 아무도 … 아니다'란 뜻으로 '오직'이라 해석할 수 있다. which는 관계대명사로 앞에 명사를 수식한다. 즉, <풍경화, 그 자신 외에 아무도 즐기지 못한, ~ >, 좀 더 부드럽게 번역하자면 <오직 그 자신만 즐긴 풍경화는 ~ >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과연 한국어로는 어떻게 옮겨 표현했을지 궁금해 읽어보았더니, 다른 내용은 동일하나 유독 이 문구만 빠져있었다. 그래서 혹시 외국에서 먼저 전시한 영문 해설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외국에서는 유명화가라고 한들 글쓴이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풍경화를 자신 외에는 좋아한 사람이 없었다는 직설적 표현으로 화가에게 돌직구를 날렸지만, 우리나라 정서상 주인공을 보러 온 자리에서 주인공을 깎아내리는 다소 불편한 문구를  것 같아, 다른 두 문화권의 각기 다른 큐레이팅의 스타일이 동시에 흥미로웠다.




    이처럼 큐레이터의 연출에 따라 작가의 그림은 사뭇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큐레이터는 화가를 컨셉에 맞게 예쁘게 꾸며주는 화가의 코디네이터 같기도 하다. 비록 무대에 직접 나서지는 못하지만, 미술계의 아담 스미스, 큐레이터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그렇게 미술관의 한 편을 가만히 채워주고 있는 큐레이터가 되고 싶었던 나의 꿈은 이젠 금빛 클림트전의 추억처럼 맑은 빛으로 나의 추억의 책장에 남아있다.


    나는 화가를 나만의 시선으로 관객들에게 미술 작품을 소개하는 큐레이터 대신, 이제는 세상을 나의 시각으로 글로 연출하는 작가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많이 읽힐 글과 내가 쓰고 싶은 글 사이에서 고민하기도 하고, 창작에 대한 고통과 머리에 스쳐가는 글귀를 부여잡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다 보니 생긴 불면증과, 때로는 반대되는 생각들과 나의 부족함에 대한 번뇌도 겪으며, 예술인의 마음을 아주 티클만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요즈음,


글쓰기의 큐레이터로 거듭나길 새롭게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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