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부터 동네 피아노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 피아노학원을 그만두었으니, 대략 20년 만의 일이다. 휴직하는 동안 시간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오랫동안 막연히 머릿속에서만 그려온 일을 당장 실행에 옮길 추진력을 갖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네이버에 <피아노 학원>을 검색하자 괜찮은 학원들이 몇 개 보였다. 그 중 내가 선택한 곳은 집에서 가장 가깝고 연습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학원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곧장 수강 등록을 했고, 20년 전의 내가 그러했듯 악보를 넣은 납작한 가방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첫 수업 날 그랜드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던 느낌이 생각난다. 진짜 피아노 건반을 느껴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집에는 로직용 미디 건반이 있지만 사용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게다가 전자 피아노는 어쿠스틱 피아노와 손에 닿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진짜 피아노를 칠 때는 어떻게 힘을 조절하는지에 따라 소리의 크기도 질감도 음이 지속되는 시간도 달라진다. 그래서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선생님은 어렸을 때 내가 피아노를 배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기본값 이하로 세팅되어 있던 나는 선생님이 갖고 있을지도 모를 그 어떤 희미한 기대감도 충족시킬 수 없는 상태였다. 선생님 앞에서 손가락과 손목은 의지와 상관 없이 아무렇게나 움직였고, 나는 마치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초등학생처럼 힘차고 씩씩하게 건반을 꾹꾹 눌렀다. 부끄러웠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다.
나의 연주(아닌 연주)를 가만히 듣던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건반을 누를 때는 손가락의 힘이 아니라 손목의 움직임으로 조절하셔야 해요.”
선생님은 손가락을 건반에 붙인 채 손목을 묵직하게 눌러 보였다.
처음 보는 악보를 눈으로 따라가기도 바쁜데 손가락도 움직여야 하고 손목도 신경 써야 하고 동시에 오른발로는 페달도 밟아야 한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치 고장 난 로봇처럼 한참을 뚝딱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그 낯선 감각에 익숙해졌다. 나는 선생님의 제안대로 기본기를 기를 수 있는 악보 책과 어렵지 않은 작품 곡을 동시에 연습해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과제 곡들을 악보대로 ‘쳐내는 것’을 넘어 감정을 담아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을 강조해야 해야 하고 어떻게 흐름을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유튜브에서 대가들의 연주 영상을 찾아보았다. 사실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울 때는 유튜브라는 것도 없었고, 같은 악보가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는 눈앞에 놓인 흑백의 악보가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담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악보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흐름을 따라갔을 뿐이다. 피아노라는 것은 엄마가 방과후 시간을 보내라고 정해준 무언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늘 장래 희망 조사지에 여느 아이들처럼 ‘피아니스트’라고 적어 내기까지 했던 것은 내가 피아노 선생님과, 선생님이 나와 동생에게 가끔 사주던 즉석 떡볶이와, 동생과 함께 손을 잡고 걷던 학원 가는 길 같은 것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옛날 피아노학원 친구들은 모두 공식처럼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거쳐 갔었다. 놀랍게도 그 악보를 다시 펼쳐보면 20년이 흐른 지금도 손가락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소나타 16번 K.545를 반복해서 들으며 이 곡이 나의 기억과 얼마나 다른 것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그 시절 우리가 초보자가 치는 곡이라고 무시하던 이 곡이, 사실은 얼마나 복잡하고 다면적이고 영롱한 것이었는지를. 그가 연주하는 모차르트는 마치 별빛 같다. 음표들이 쉴 새 없이 건반 위로 마구 쏟아져 내린다. 선생님에게 과제 곡으로 이 곡을 하고 싶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좀 더 서정적이고 듣기 편한 곡을 선택하리라 생각한 것 같았다.
이 곡을 감히 손열음처럼 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예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연주해 보고 싶었다. 악보의 셈여림표와 쉼표와 음의 길이를 헤아려 보면서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름다움을 아는 곡을 더듬어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https://youtu.be/1FCWXPEIONo?feature=shared
글 - 주페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