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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즈키 Aug 25. 2020

무죄추정의 원칙

남편의 교통사고 이후

지난주에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평소 남편의 겁 없는 운전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차만 타면 미친 듯이 끼어들기 본능으로 질주하는 남편에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내가 운전하면, 난 벌써 천국행 급행열차 탔어. "라고.

그런데 막상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오히려 당사자가 자신을 가해자로 먼저 경찰에 신고했단다. 남편은 교통법에 관한 특별사법경찰에게 조사받았다고 한다.

나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해 놓고 늦은 밤 시무룩한 모습으로 귀가했다. 이유인즉슨 자신은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가해자'로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당시 정황 등을 물어보기도 전에, 결론은 이미 정해져서 자신을 가해자로 몰아가는 게 느껴졌다고 한다. 자신도 열 받아서 경찰서에서 진상 아닌 진상을 부렸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찰 못 믿겠으니 과학수사연구소까지  의뢰해달라고.


뭔가, 뭔가.. 이거 내 상황인데..

남편에겐 미안했지만,

그 특별사법경찰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면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결국 수사관도 사람이야. 감정적으로 격하게 대응할수록 수사관도  방어적으로 될 수밖에 없어.  그리고 나도 사건 하는데, 사실 출석하기 전에 진정서만 봐도 대충 감이 와. 결론이 어느 정도 깔린 상태에서  조각들을 맞춰간다고 할까."


남편은 힘주어 말한다.

"그래도 아직 결과가 확실히 나오기도 전에 내가 가해자 취급을 당하는 게 너무 화가 나더라. 경찰관이 내 이야기는 아예 듣지도 않고 말이야. 그래서 나도 한바탕 질렀어."


어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바로 내가 사업주에게 듣던 말이었다.


노동청에 들어오기 전에, 감독관 초창기에도

돈 안 준 사장=나쁜 놈=범죄자의 사고를 갖지 않았던가.  진정서에 감정 이입하여 원한을 풀어주겠다고 사장한테 빨리 돈 입금하라고 득달같이 전화했던 나였다.


자신을 범죄자 취급한다며 국민 신문고에 신고한 사업주를 보면서는 콧방귀를 뀌었다.

'월급을 제대로 줬으면 범죄자 취급을 받을 필요도 없잖아.' 라면서 말이다.


특히 출석요구까지 거부하는 사업주를 보면 난 더 득달같이 달려들어 압박했다.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더 저러는 거라고.




그런데 남편의 일을 겪으면서 나를 반성하게 됐다.

아마 그들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내가 그들의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돈 안 준 게 맞냐고만 다그쳤던 내 모습에 그들 또한 나만큼 상처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건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나의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피진정인이 인정하는 순간부터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사건은 끝날 수 있으니까.

진정인을 약자로만 여기고 그들은 사업주보다 더 억울할 것이라는 나의 무지함도 돌아봤다.



몇 번씩 연락이 두절된 후 오늘 아침에 겨우 출석한 간병인협회 대표도 그런 경우였다. 전화 통화했을 때부터 조사에 비협조적이었다. 진정인뿐만 아니라 근로감독관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교통사고를 겪은 후에 사업주에게 출석 요구하는 나의 태도를 조금 바꾸기로 했다. 당신은 범죄자로 신고당했으니  무조건 나와서 조사받을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진정인은 이렇게 주장하고 저희한테 이렇게 진술했고 아직 확정된 건 없다고.  단지 출석하셔서 본인의 진술을 하시면 감독관이 조사 후 판단하겠다고.

그러자 웬일로 시간을 내서 나오겠다고 했다.

내가 근로감독관은 법적으로 출석요구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에 출석하셔서 진술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을 땐 심히 반발했던 피진정인이었는데 말이다.


노동청에 출석하여 처음에는 나에게 분한 감정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나 조사가 진행되면서 차츰 협조적인 태도로 변했다.

진정인이 몸이 힘들다고  병원에서 소리 지르고 행패 부려서 자신이 소개해준 병원에 자신은 고개도 들 수 없었다고. 병원도 그런 진정인한테 애초 계약한 일당을 주는 게 맞지 않다고 하여 일당을 반으로 삭감했음에도 도의적으로 원래 계약한 일당의 90퍼센트 정도는 지급해줬다고.  


어쨌든 옆에 계신 팀장님의 메신저 지원 사격으로

사업주는 필요한 질문들에 적절히 대답해줌으로써 동 사건은 끝날 수 있게 되었다.


무죄추정의 원칙.

잊어버렸던 원칙.  물론 때론 이 원칙을 적용하고 싶지 않은 사업주도 있긴 마련이지만,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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