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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isu Feb 05. 2022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아직 죽지 않은 이유


시작과 동시에 끝을 생각하는 일이 있다. 시험 종료 날을 기다리는 수험 공부, 목표한 체중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는 다이어트, 이 둘이 대표적이다. 언제 끝나는지만 기다리며 힘든 시간을 견뎌내기 마련이다. 과정이 괴로울 수록 끝을 기다리게 된다.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이별을 생각하지는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생의 끝,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인생을 사는게 행복하기만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괴로운 쪽인데 왜 끝을 생각해보진 않았을까.


 죽음을 잘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흔히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는데 난 아니었다. 죽음이 두렵다기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거 자체가 살아가는 데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여겼다. 당장은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 굳이 두려워하거나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하고 넘겼다. 끝을 모르는 것이 현재, 그러니까 삶에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왠지 배드 엔딩 같으니까.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 해피 엔딩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끝이 배드엔딩이라고 스포일러하는 기분이었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인데 당연한 걸 부정하면서 살았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건 사실이다. 어떤 사실에 호불호를 가질 필요는 없다. 죽음이 싫다고 하는 건 중력이 작용하는게 기분 나쁘다고 하는 것처럼 어불성설이다. 


 오래된 취미가 있다면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나라면 어땠을 지를 생각하는 일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이 일탈을 하는 스토리의 극의 주인공들은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평소 하지 못했던 일을 하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다 행복한 모습으로 삶을 마무리하거나 사실은 시한부가 아니라 의사의 오진으로 일어난 헤프닝이었다 정도로 끝난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결국 그들의 삶을 돌아보게 했으며 지금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가라는 메세지를 남긴다. 보통 이런 극을 보고서는 꽤 간단하게 생각했다. 나라면 그대로 살아야지. 내일 당장 죽더라도 내가 살아온 날의 부족함을 자책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대로 살리라는 다짐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이제는 아쉬움이 남지 않는 삶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어도 내일 죽을 거라면 당장 가족들에게 전화해서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백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 삶에 있어줘서 고마웠다고 울며불며 말할 것이다. 자산이라고는 학자금 대출금 밖에 없어서 나눠줄 거도 없지만 산지 얼마 안 된 맥북은 누구에게 남길 지 고민할 것이다. 지금을 잘 살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죽음은 그냥 있는 것이다. 어디에 언제 어떻게 있을지는 모르지만 존재하는 것. 삶의 형태를 바꾸는데 죽음이 반드시 필요하진 않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 내 마음대로 살기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너무 큰일이다. 그냥 내일 당장 죽더라도 최대한 덜 미련없는 삶을 사는 쪽이 더 쉬울 것이다. 


 주인공 원도가 과거를 회상하며 어디서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난 왜 죽지 않았는지를 생각하는 소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원도는 어른이다.
 먹을거리를 스스로 마련해야하는 어른.
 배고프면 직접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까지 해야 하는 어른.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깨면, 깨진 그것을 직접 치워야하는 어른. 
가끔은 자기 아닌 타인에게 너 밥은 먹었니 물어보는 어른.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는 어른.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최진영-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의 내면의 생각과 이야기이지만 마치 나에게 지금 너도 죽을 수도 있는데 죽지 않고 있는 상태라 말해주는 거 같았다. 소설을 읽는 동안은 불편한 감정이 들었는데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했다. 현실에서 마주치면 상종도 하기 싫은 주인공 원도가 마지막엔 인간적이게 느껴지기도 했다. 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적 없다. 흔히 청소년기를 지나며 한 번쯤은 생각해 본다는 그 흔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나에게는 산다는 건 대전제였다. 산다는 전제 하에 가끔 혹은 자주 힘들고, 지치고, 환멸이 나고, 우울하고, 무기력한 것이지 대전제를 바꾸고 싶은 순간은 없었다. 


디폴트 100인 인터뷰 당시 한 참가자의 참여 동기는 죽은 친구를 위해서 였다. 먼저 떠난 친구는 떠나기전 이 인터뷰에 참가할지 말지 고민했었다고 한다. 그 친구를 보내주고 나서 계속 마음에 남아 본인이라고 인터뷰에 참여했다고 동기를 밝혔다. 어떤 리액션을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듣는 것만이 고인에 대한 예라고 생각했다.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그 참가자의 답은 살아내자는 메세지였다. 

“이제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아서...죽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여성과 죽음은 가까이 있다. 


 당신은 왜 아직 죽지 않았는가? 죽지 않은 이유를 물어본다면 살아있으니까 죽진 않았다 정도로 대답할 수 있겠다. 살아야 하니까, 살고 있으니까 이왕이면 더 행복하려고 애쓰며 살았기 때문에 죽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는 질문은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죽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이 만약 선택 사항이라면 내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분명히 있을테니 죽지 않은 것은 내 결정인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삶의 주체가 나로 명확해진다. 우린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고 앞으로도 늘 삶을 선택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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