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없이 자원봉사 활동해보려고 떠난 길바닥 여행기 (16)
“자자, 줄 좀 서주세요!”
멀리서 봐도 100명은 족히 넘어 보인다. 아직 진료소 문을 열기도 전인데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남녀노소 불문, 긴 줄이 늘어섰다.
“아주머니 도대체 언제부터 와 계신 거예요?”
긴 줄에 압도당해 넉이 나간 채 물었다.
“꼭두새벽에 출발 했다우. 언제 도착했는지 기억도 안나.”
100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줄 앞부분에서 뿌듯하게 기다리시는 아주머니께서 대답하셨다. 그러자 아주머니 바로 앞에 서있던 할아버지께서 한마디 툭 던지셨다.
“꼭두새벽이 뭐람. 나는 소식 듣고 이틀 걸어 도착했어. 아이고.”
‘트리슐리 마을’에 머문 5일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라파엘 클리닉 실무자님들과 의사, 약사, 간호사 선생님들께서는 늘 뛰어다니셨다. 식사할 여유도 없었으며, 밤에라도 긴급한 환자가 생기면 언제든 달려 나가셨다. 할아버지께서 걸어오신 ‘이틀’이란 시간의 의미를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ABC)을 무사히 마치고 포카라에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내려왔다. 산 좋고, 공기 좋은 포카라를 남겨두고 카트만두로 내려온 이유는 네팔의 오지마을 '트리슐리'로 향하는 '라파엘 클리닉'의 의료봉사활동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라파엘 클리닉과의 만남은 인사동 밤거리에서 손정화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희망제작소, 모금전문가 학교를 함께 다니며 알게 된 손정화 선생님은 내가 1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사랑에 빠졌을 법한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다. 힘들어하는 점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시고, 정확한 조언으로 나를 이끌어 주시는 ‘멘토’ 셨는데, 그런 선생님께서 네팔 의료 자원봉사를 준비한다는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의 귀띔은 나를 인사동의 밤거리에서 이미 네팔의 밤거리로 옮겨 놓기에 충분했고, 결국 11월, 덥지도 춥지도 않은 네팔의 밤거리에서 선생님과 나는 거짓말처럼 마주했다.
“우와! 선생님, 여기서 또 이렇게 만나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그러게 하섭아. 너무 반갑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선생님은 함께 오신 다른 선생님들을 소개해 주셨다.
"여기는 코이카 소속으로 네팔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박향숙 선생님이야. 인사드리렴.”
박향숙 선생님은 일주일 동안 우리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셨는데, 천상 우리 고모 스타일이셨다. 여장부이면서도 소탈한 웃음을 짓는 박향숙 선생님은 기가 막히게 네팔어를 잘 쓰셨는데, 함께 거리를 걸으면 바가지 씌우려던 악덕 상인들도 잠자코 있을 정도였다.
‘트리슐리’라는 오지 마을로 함께 떠날 의사, 약사, 간호사, 자원봉사자 선생님들과도 설레는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봉사단장으로는 EBS 다큐 ‘명의’에도 나오신 김웅한 서울대 의대 교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셨는데, 출발 전날 밤 가졌던 진지한 미팅이 나에겐 너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하게 될 자원봉사 상황을 예상해 보고, 일정을 조율하는 등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선생님들 각자 모든 걸 쏟아부을 심산이었다.
“자자, 일주일도 체 안 되는 짧은 시간이니까,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옵시다.”
단장님의 그 말씀에 순간 뜨끔해지는 나였다.
그동안 너무 느슨하게 자원봉사를 ‘즐기기만’ 했던 건 아닌지 부끄러워졌다.
서로를 격려하며 미팅을 마무리한 후, 새벽 일찍부터 시작될 여정을 위해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우리는 ‘트리슐리’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반나절 동안이나 골짜기를 넘고 넘어 우리를 낯선 마을에 내려다 줬다.
“저 건물이 병원이에요?!”
도착하자마자 찾아간 ‘병원이라 이름 붙여진 건물’은 가히 충격이었다. 위생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라 도착하자마자 의사 선생님들조차도 청진기 대신 빗자루를 먼저 들어야 했다. 그나마 네팔 코이카 단원으로 계신 형, 누나들께서 아침부터 청소를 해주셔서 이 정도였지, 아니었다면 하루 종일 진료도 못하고 청소만 해야 할 정도였다. 우리가 청소하는 모습을 보자, 현지 병원 관계자분들도 괜히 미안하고 머쓱했는지 청소를 거들어 주셨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오후 진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자원봉사는 보태고 뺄 것 없이 딱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나는 ‘실무지원팀’이라는 이름으로 환자 접수와 신체 상태를 체크하는 일을 맡았는데, 진료를 받으려고 몰려온 사람들이 어마어마했다. 기다리는 줄은 롯데월드 바이킹 줄보다 더 길게 늘어섰는데, 그마저도 감당이 안 될 만큼 매일 불어났다. 한국 의사 선생님들이 용하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하루 걸어 저 멀리 반대편 동네에서 오는 건 기본이었다.
“어제 출발해서 오늘 오후에 도착했다네. 오늘 꼭 좀 치료받을 수 없을까?”
“우리 딸도 좀 봐주세요. 하루 종일 걸어왔다고요.”
결국, 하루 종일 기다려도 진료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누어주고 나서야, 환자분들은 어둑해진 밤거리로 발길을 돌렸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한 명이라도 더 진료를 보기 위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점심식사를 해가며 선생님들은 진료를 감행했다. 내가 속이 탈 정도였으니, 직접 환자와 마주 보고 진료를 보시던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은 그 심정이야 오죽했었을까.
그래도 그만큼의 보람은 충분했다.
“응애! 응애!” “축하합니다. 딸이에요!”
봉사기간 동안 산부인과 전문의 전종관 교수님을 비롯해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은 매일 밤낮으로 힘을 합쳐 무려 5명의 아기 천사들을 받아 내셨다. 자칫 잘못하면 산모와 아이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여건 속에서 만들어낸 기적이라 더욱 놀라웠다. 그 외에도 모든 의료진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신 덕분에,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수많은 환자분들의 손에서는 약봉지를, 얼굴에선 안도의 미소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루 중 내게 가장 기다려졌던 시간은 매일 저녁 식사 후 다 같이 모여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의사, 약사, 간호사 선생님들은 하루의 일들을 공유하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의학 용어들을 쏟아 내셨는데, 보고 있으면 흡사 의학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만 같았다. 괜스레 나도 마치 의학드라마 속 주인공이라도 된 마냥,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 밖에도 하루의 문제점들이나 고쳐야 할 사항, 협조가 필요한 점들까지 자유롭게 이야기 나눴는데, 누구 하나의 목소리도 묵살되지 않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던 시간이 내게는 참 따뜻했다.
“우리 이야기도 너무 잘 들어주시고, 아픈 사람들을 진심으로 만져주셔서 고마워요”
함께 봉사활동에 참여한 네팔인 여자 간호사 선생님의 말처럼, 라파엘 의료진 선생님들은 진심을 담아 네팔 사람들을 치료해주셨다. 할아버지가 병원까지 걸어오셨다는 그 ‘이틀’의 고생은 그동안 병으로 고생한 세월에 비할 게 못 된다는 걸, 의료진 선생님들도 너무 잘 알고 계셨던 까닭이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나는 봉사단장 김웅한 교수님과 한 방을 쓰는 영광을 누렸다. 김웅한 교수님은 아동 심장 수술 분야의 세계 최고 권위자이셨는데, 그런 교수님인지라 처음 한 방을 쓸 때는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하루, 이틀 밤이 지날수록 나를 아들처럼 챙겨주시고 아껴주시던 김웅한 교수님이 더없이 좋았다. 나 역시도 또 한 분의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밤마다 ‘사랑’이라는 주제부터 ‘꿈’, ‘종교’에 관한 고민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을 들었는데, 그 순간, 순간이 모두 더없이 귀하고 소중한 배움의 연장선이었다. 결코 어떤 강의실에서도 들을 수 없는, 어떤 비싼 강연을 찾아 가도 배울 수 없는 인생수업을 1:1 과외로 받은 느낌이랄까. 그것도 공짜로. 함께 자원봉사를 했던 한 분, 한 분 모두 너무나 과분하고 또 소중한 인연이었지만, 김웅한 교수님만큼은 더 특별히 기억되는 이유이다.
드디어, 정해진 시간이 흘러 트리슐리 마을을 떠나는 날. 남아있는 환자들을 두고 떠나려니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평생 네팔에 남아 있을 순 없는 노릇이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대신 수술이 꼭 필요한 환자들은 카트만두 근처 병원으로 데려와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오래전부터 네팔에 살며 의료 봉사를 하고 계신 박철성 의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카트만두 인근 병원의 수술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네팔의 유적지를 탐방하는 시간까지 반납해가며 마지막까지 수술실에 들어가는 선생님들의 열정을 보며, ‘NGO 활동의 정석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몇몇 NGO단체들은 카메라맨들과 자원봉사자들을 잔뜩 데려와, 신나게 사진을 찍고 이삼일 봉사하는 시늉을 하고는 네팔 관광만 하고 돌아가는 걸 두 눈으로 보기도 했다. 누구를 도와야 하는지 목적을 잃어버린 채, 기부자들에게만 잘 보이기 위해 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국제개발 NGO단체의 이런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고, 또 여러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기부를 꺼린다. 더 많은 기부자를 유치하고 또 그들에게 만족을 주는 데 쓰이는 돈과 인력들이 너무 많다 보니 주객이 전도되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NGO단체들이 잘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진심을 담아내고 있다.
적어도 내가 만난 ‘라파엘 클리닉 인터내셔널’은 한숨 돌릴 시간도 없이 땀을 흘리며 바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네팔 의료지원단이 누와 코트 주 트리슐리 지역 의료 나눔을 마치고 모두 무사하게 귀국하였습니다. 이번 의료 나눔은 진료 1천6백여 건, 분만 5건, 수술 6건 등을 수행하였고, 주민들의 호응이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이번 진료에는 현지 티미 병원에 파견된 의사, KOICA 직원, 민간 봉사단 등 10여 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통역 등 지원업무에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의료진과 봉사단원 모두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마스테~ "
- 라파엘 클리닉 인터내셔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