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베개 Dec 06. 2019

묵언 수행이 끝나자마자 일어난 일

산에서 산을 그리워하는 까닭

 내일이면 송광사를 떠난다. 떠나기 위한 의식은 ‘송광사 경내 순례’로 시작되었다. 그동안 생활하면서 절의 요모조모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지라 궁금증을 풀 수가 없었다. 순례가 시작되면서 묵언의 규제도 잠정적으로 해제되니 많은 것을 알게 될 것 같아 기대가 컸다.


 송광사 경내를 오고갈 때 자주 떠오른 분이 있었다. 그 글의 문체 때문에 그리고 규범적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여 불우하게 살다가 간 소품(小品) 문인 이옥(李鈺, 1760∼1815). 그는 소설 문체를 구사했다고 삼가현(지금의 합천)에 충군(充軍: 변방의 군역을 하는 형벌)되었다가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송광사에 들러 하룻밤을 자고 갔다.


 이옥은 이때 「남정」(南程)이라는 산문을 남겼다. 이 글에서 그는 송광사의 여러 전각 중 나한전을 가장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500여 나한들이 모셔진 모습을 보고는 ‘만 명이 모인 시장 같다’고 했다. 계곡 건너에 있는 ‘종이 만드는 곳’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곳에는 일꾼들이 종이를 만들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풀질을 하기 위해 몽둥이를 휘젓고 다 만들어진 종이를 말리기 위해 새끼줄을 거미줄처럼 치고 있었다.


 이옥은 송광사의 역사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보조국사 지눌이 입적한 사실도 “이 절은 큰스님이 장엄하게 입적한 곳이다”라고 간단하게 지적했을 따름이다. 대신 송광사에서 ‘시장’과 ‘공장’을 보았다. 속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찰에서 가장 세속적인 것을 발견하다니. 시장과 공장,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적한 절간에서 품위 있게 수행하는 스님들과 둘이 아니라는 것. 사실 조선 시대에 천민 대접을 받았던 스님들은 잔일 굵은 일로 매일매일을 고달프게 보냈다. 만일 그들이 둘이었다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거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스님보다 더 가까이하고 싶다는 뜻을 이옥은 나타낸 것일게다.


 이옥이 감탄했던 나한전은 지금 없고 종이 만들던 공장도 흔적조차 사라졌다. 나는 다만 그가 하룻밤 묵은 곳이 내가 자는 이 어름이겠지 생각하며, 신산한 삶을 살다 간 문인의 일생을 그려 보았을 따름이다. 그리고 뒷날 어느 문인이 또 이곳에 잠시 들렀다가 내가 쓴 이 글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찰 순례는 지눌이 꽂은 지팡이가 자라서 되었다는 고향수(枯香樹)에서 시작되었다. 고향수는 보조국사 지눌이 꽂아 놓은 향나무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 했다. 지눌은 “너와 내가 생사를 같이하리라. 내가 떠날 때 너도 또한 떠날 것이다. 어느 봄날 너에게 푸른 잎이 돋아나면 나 역시 그러할 것이다”라는 시를 지었는데 과연 그 지팡이에서 이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뒤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나무는 거듭 수난을 당했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친 울타리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돋운 게 화근이었다. 나무를 되살리는 방법은 나무를 보호하던 울타리를 없애는 것이었다.


 지도 법사는 절의 역사와 불교의 가르침을 적절하게 연결시켜 설명하여 수련생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말을 다시 할 수 있는 것이 분위기를 달라지게 했다. 그런데 말을 하면 안 되었기에 말을 하지 못했는데,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말하는 것이 어색했다. 말을 하려다가도 머뭇거리고 한마디 말을 하고 난 뒤에도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는 후회가 생겼다. 그러나 곧 말을 하게 된 것을 환호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남보다 더 많은 말을 하여 으스대려고 했다. 그들은 길어진 자기의 말에 문제가 생기거나 남이 반론을 제기하면 자기 말을 변명하기 위해 더 길게 말을 했다. 반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의 말을 그냥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남의 말을 듣고만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했다.


 묵언 때문에 서로의 사적인 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지내 왔는데, 말을 하게 되니 말하는 사람이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를 은근히 드러내어 자랑하기도 했다. 우담발라 꽃이 정말 그런 모양으로 피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내가 인도에 가 보니 그렇더라”라던가 “어느 큰스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리고 자기를 그렇게 과시한 이상, 그런 자기의 위상을 훼손하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묵언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맛본 뒤라 나는 그런 분란이 참 불편했다. 대웅전 안에서 말이 일으키는 분란을 보며 말로써 생계를 꾸려 가는 나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말이 시작되면서 집착과 불평등의 씨가 움텄다.


 대웅전 불단의 장식들은 무의미한 것이 없었다. 삼존불을 받치는 연대(蓮臺)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과거불인 연등불과 미래불인 미륵불을 받치는 연꽃은 오므라져 위를 향하고 있는 데 반하여 현재불인 석가불을 받치는 연꽃은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다. 세상 꽃들은 해가 뜨면 꽃잎을 펴고 드리웠다가 해가 지면 오므려 봉오리를 만든다. 꽃이 스스로 폈다가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연등불에서 석가불로, 다시 미륵불로 나아가는 것은 봉오리였던 연꽃이 폈다가 오므리는 과정일따름이었다. 연등불을 이어서 연꽃을 피우고 있는 석가불도 그 꽃을 접고는 연등불이 될 것이다. 석가불의 뒤를 이어 연꽃을 피울 미륵불도 석가불이 밟고 간 길을 따라갈 것이다.


 일반 관람객에게는 개방되지 않은 곳으로도 들어갔다. 조실(祖室: 사찰의 최고 어른인 방장)과 주지 스님이 거주하는 집을 지나 대웅전 뒤쪽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행자 스님들이 예불을 하기 위해 대웅전 뒷문으로 들어오기 전 꼭 합장 반배하던 그곳은 국사전이었다. 송광사가 배출한 16조사(祖師)를 모셨는데, 실제키에 가깝게 그려진 조사들의 영정은 형언키 어려운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대웅전과 국사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집, 그래서 송광사에서 가장 높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예불을 볼 때마다 대웅전 뒤의 축대를 향해 앉았는데 그 축대는 어떤 집을 위한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축대 위 집에는 수선사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스님들이 참선 수행을 하는 곳이었다. 삼세제불보다 더 높은 곳에 수행하는 스님들이 앉아 있게 한 가람 배치에 송광사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참선의 전통이 우리나라에서만 변질되지 않고 면면히 계승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정신 덕일 것이다.


 지눌의 부도탑에 올랐다. 부도탑은 목조삼존불이 그러했듯 아주 작게 조성되어 있었다. 송광사는 모든 것을 작게 검소하게 조성하려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부도탑에서 내려다보니 뭇 산봉우리들이 운무에 싸여 있었다. 연못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연꽃과 같았다.


 불일암으로 향했다. 우거진 대나무들이 얼핏 나타난 여름 햇살을 아주 잘게 썰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까 걱정이 되었다. 호젓한 곳에서 한마디라도 다시 말을 하면 묵언의 공든 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일행으로부터 멀어졌다. 


 불일암 옆의 자정국사 사리탑에 이르렀다. 거기서는 지도 법사를 중심으로 하여 한 무리의 수련생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일상생활 중의 수행에 대한 쪽으로 수렴됐다. 운전하면서도 참선을 할 수 있나, 일상생활 중에 얻은 것도 화두로 삼을 수 있나, 불교의 포교 방식에 어떤 문제가있나, 해인사는 크게만 나아가고 송광사는 작게만 나아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갖가지 화제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서서 발언하는 수련생마다 자기가 ‘초심자’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 말의 수준이 녹록하지 않았다.


 갑자기 지도 법사가 고함을 질렀다.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가 지적받았던 그 도반이 지도 법사가 말씀할 때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었기 때문이다. 지도 법사는 그녀에게 당장 떠나라고 고함쳤다. 그러자 그녀도 잽싸게 사라졌다. 사찰들이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는 왜 선교원을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지도 법사의 언성은 높아졌다. 사찰에는 돈이 없다, 송광사의 1년 수입이 도시의 작은 교회만도 못하다, 이번 수련회가 시작되기 직전에도 송광사 스님들은 수련생들이 먹을 쌀을 꾸러 다녔다, 가난한 사찰에 선교원을 세우라고 요구하지 말고 스스로 돈을 희사하여 선교원을 만들어 놓고 스님을 부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옮겨 가면서 분위기가 굳어졌다. 그냥 가볍게 질문한 도반은 뜻밖의 꾸중에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마침내 수련생 사이에서도 언쟁이 일어났다. 초심자를 자처한 어떤 도반이 화두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다. 좌중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웃음소리가 왜 났는지 알 수 없었다. 더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그 웃음이 그 말에 대한 것이 아닌 듯했는데, 말한 도반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낸 것이다. 말이 이렇게 정확한 소통을 어렵게 하기도 했다. 초심자를 자처한 그 도반은 자기가 초심자 대접을 받았다고 더 화를 내기도 했다.


 나는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그동안 묵언으로 이루었던 마음의 평정과 평화가 서서히 깨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니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하산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저 세상으로 다시 내려가 살아남으려면 서서히 입술과 혀에 채운 족쇄를 풀고 거기에 힘을 실어 말싸움 연습을 해야 했다.


 불일암으로부터 내려오는 발걸음에 힘이 빠졌다. 불일암 벽에 걸려 있던 눈 덮인 히말라야 그림이 떠올랐다. 산에서 산을 그리워하는 까닭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작가의 이전글 예불을 마친 후 당황한 사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