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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베개 Nov 21. 2019

참선 수행을 방해하는 번뇌들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절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시주자의 공양물을 소비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그 이상의 이로움을 중생에게 갚을 수 있어야 한다. 신심 깃든 밥 한 알, 김치 한 조각을 버려서도 안 된다. 이런 정신을 실천하는 밥 먹기 의식이 발우공양이다. 그것은 먹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밥그릇인 1번 발우를 이마에 대고 이 오관게(五觀偈)를 외울때면 어느덧 울먹거려져 목소리를 잘 낼 수가 없었다. 작은 핏덩이로 태어나 이렇게 큰 몸이 되었으니 그간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던가. 나의 몸은 다른 생명들을 수없이 희생시킨 증거다. 내 육신은 공격적 포획과 과대 포장의 결과였다. 


 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발우들을 씻어 낸 숭늉뿐만 아니라 천숫물까지도 다 마셨다. 천숫물은 아귀를 위해서 베풀어 줄 공양물이다. 아귀의 목구멍은 바늘구멍보다 좁다. 아무리 작은 찌꺼기도 아귀의 목구멍에 걸릴 수 있다. 여기에 두 가지 뜻이 깃들어 있다. 먼저 작은 음식 찌꺼기조차도 버리지 않고 아귀에게 바친다는 보시 정신이고, 다음으로 음식 찌꺼기를 남기는 것은 아귀의 목구멍을 막는 폭력 행위이기에 조심하라는 자비 정신이다. 나는 후자의 뜻을 취했다. 아귀의 목을 막아 죽게 할 수도 있는 천숫물을 버리지 않고 내가 마셨다. 


 과식을 피한 결과 몸무게가 5일 만에 몇 키로가 줄었다. 내가 과대 포장되어 있었던 게 맞았다.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음식을 먹는 것은 죄악이었다.


 묵언과 발우공양은 모두 입과 관련된 것이었다. 입이 입술과 혀와 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각성되었다. 입술과 혀 사이에 숨겨진 이는 어느 순간 날카로운 칼이 되고 톱이 된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소리치는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드러난 이가 상대방을 깨물거나 자를 것 같다. 내 입에서 군침이 돌 때, 나의 이는 살려고 발버둥 치며 도망치는 다른 생명체를 잡아 죽여 토막과 가루로 만드는 칼과 맷돌이 되기도 한다. 입은 복합 살상 무기의 은닉처였다. “입과 혀는 재앙이 만들어지는 문이요 육신을 멸망하게 하는 도끼다”, “남을 해치는 말이란 그 날카롭기가 가시바늘과 같다”는 『명심보감』의 말씀이 떠올랐다.


 오리엔테이션은 엄격하고 단호한 분위기에서 계속되었다. 수련생의 신분은 주부, 대학생, 직장인, 군인, 수녀, 의사, 판사, 대학 총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고 했지만 누가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수련생들은 ‘출가’란 글자가 찍힌 하늘색 티와 수련복을 입었다. 머리칼의 희고 검음, 얼굴 주름살의 많고 적음, 키의 크고 작음 등은 구분의 기준이었지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정진반 16번’ ‘지혜반 3번’ 등으로만 불려 다른 수련생과 구분되었다. 차별 없는 완전한 신분 해방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자기 반의 일, 자기 번호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했다. 국통을 들고 오라 하면 들고 왔고, 숭늉 통을 들고 나가라 하면 들고 나갔다. 해우소를 청소하라 하면 곧바로 달려갔고, 불을 끄고 자라 하면 당장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 완전한 평등이 뜻밖에도 나를 편안하게 했다.


 지도 법사도 평등의 실천에 철저했다. 누구라도 청규를 어기면 가차 없이 응징했다. 그것은 무슨 반 몇 번에 대한 응징이었다. 줄을 잘못 서거나 엉뚱한 행동을 해도 꾸중했고, 행동이 전체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할 때도 꾸중했다. 대웅전 건물이 극락으로 가는 반야용선이듯 사자루 건물도 짧은 기간 동안 극락 가까운 어디까지 갔다 돌아올 수레여서 그 속이 질서정연해야 하는 것 같았다.


 여자 수련생은 화장을 할 수 없었다. 화장한 것이 발각되면 당장 지우고 와야 했다. 그 외 어떤 몸치장도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 수련생에게는 담배나 술이 금지됐다. 휴식 시간을 지키는 것도 철저했다. 지각을 하면 앞으로 나가 삼배를 하고 자기의 잘못을 대중 앞에서 인정하는 말을 되뇌게 했다.


 도반들이 밖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수녀님과 대학 총장이 어느 분인지 궁금했다. 몇 줄 건너 단발머리를 하고 얼굴이 하얀 분이 수녀님이고 입구 쪽 줄 중간쯤에 앉은 굵은 테 안경을 낀 늙수그레한 어른이 대학 총장이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대열의 중간쯤에 앉아 조금도 흩트리지 않고 정진에 힘쓰는 젊은 여성의 직업도 궁금해졌다. 그녀는 휴식 시간에도 눈을 내리깔고 참선을 하거나 염송집을 읽었다. 그녀는 수련 기간 내내 내 정진의 길잡이가 되었다.


 다른 수련생들도 진지하고 단정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휴가를 이곳에서 힘들게 보내려고 온 분도 많았다. 정진에 대한 염원이 아름다웠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혼자 있게 되었다는 중년 여성이 있었고 예순을 넘긴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분들도 수행을 향한 나의 분발심을 북돋워 주었다.


 눈에 계속 띄어서 내가 수행에 집중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도반도 있었다. 스카프를 목에 두른 도반이 내 눈에 거슬렸다. 그녀는 이곳저곳 절의 수련회나 법회에 참가한 경험이 많은 듯했다. 그녀는 자기의 불교 지식과 절 경험을 과시하려는 듯했다. 그녀의 그런 마음가짐과 행동이 지도 법사에게 정확하게 포착되었다. 지도 법사는 그때마다 벌을 내렸다. 불만과 섭섭함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부담스러웠다. 아, 지도 법사님은 저렇게 ‘뜨고자’ 하는 여성을 그냥 좀 뜨게 해 주지. 이런 생각이들기도 했다.


 다음으로 깍듯한 예의를 갖추고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도반이 눈에 들어왔다. 그도 불교 교리와 수행에 대해 일가를 이룬 듯했다. 모범적인 자세로 수행에 임했지만 기회만 있으면 나서서 참견했다. 사사건건 옆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고 손짓하거나 소곤거렸다. 그런 모습이 불편했다.


 우리는 강의 대열로 앉기도 하고 정진 대열로 앉기도 했다. 강의 대열은 설법을 듣기 위해 설법 스님을 향해 앉는 것이고, 정진 대열은 여섯 줄을 만들어 두 줄씩 마주 앉는 것이다. 강의 대열에서 정진 대열로 바꿔 앉으니 내 앞에는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무척 검었고 입도 약간 비뚤었다. 손가락이 굵고 주먹도 컸다. 그는 그 우람한 손발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잔기침을 하고 긴 한숨을 짬짬이 뿜었다. 눈길도 갈피를 못 잡았다. 그가 다른 수련생의 정진을 방해하려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참선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 눈과 귀와 마음에 포착된 도반들의 소리와 잔영을 지우느라 앞으로의 참선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생겼다. 번뇌를 벗기 위해 왔는데 번뇌를 더 늘리고 업을 더 쌓게 할 것 같은 도반들을 만났으니 그들은 전생에 나와 무슨 악연이 있었을까? 아니면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는 성현의 말씀처럼 그들은 나의 정진을 돕기 위해 애써 장애를 만들어 주려 하는가?


 문득 대학 시절의 한순간이 떠올랐다. 소음에 대해 너무나 예민해졌던 나는 소음으로부터 해방된 적막강산을 기대하며 삼랑진 만어사로 들어갔다. 삼랑진역에서 두 시간 이상을 걸어 만어사 동구에 이르렀다. 걸어서 두 시간의 거리는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멀어지기에 충분할 것이라 여겼다. 그 순간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조짐이 안 좋았다. 그날부터 옆방의 고시 준비생들이 내는 온갖 소리에 시달리며 석 달을 보냈다. 절의 주위가 조용해지는 밤이면 옆방의 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려와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소리는 들리지 않기도 했다. 분명 옆방의 소음은 지속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소음조차 자기가 어떤 자세로 어떻게 듣는가에 따라 들리기도 하고 들리지 않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러나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달랐고, 느끼는 것과 깨닫는 것은 또 달랐다. 내가 대상에 대해 초연해졌다고 의식하는 것과 스스로 초연해지는 것은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분별적 감각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우며 또 쉬운가?


 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위 도반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들로부터 초연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초연해지는 것은 왜 다른지, 그것을 또 다른 화두로 삼아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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