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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 Jan 14. 2022

우리에겐 위기감이 필요하다

[속초 한달살기] D7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 매일의 하늘은 하얗게 피어나 구름들을 시리게 감싸 안아주었고, 양말을 신어도 옷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은 온몸을 춥게 만들었다. 이곳저곳에서 휴식과 새로운 만남을 경험하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와는 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을 만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누구와는 가벼운 눈인사로 인연을 매듭짓기도 했다.


오늘 이곳에서 일한 스텝 중 한 명이 마지막으로 근무하는 날이다. 비록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들이마셨다는 이유만으로 헤어짐에 미묘한 감정을 가지기엔 충분했다. 첫 만남부터 꽤나 차가운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홀로 있는 시간의 모습이나 간혹 가다 꺼내는 단어 몇 가지는 나에게 궁금함을 자아냈고 떠나기 전 마지막 밤, 달이 떠오르고 우린 그제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람은 아무 연고도 없는 먼 미국 땅에 기회를 부여잡기 위해 날아갔고, 홀로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며 일을 하다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모든 것들을 직접 일궈내야 했던 그때와 달리 다시 고향에 돌아오니 신경 써야 할 것들도 많아지고 나름의 편안함을 되찾으니 발전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면서 꺼내놓지 못해 답답했던 지난날의 시간들을 조용히 털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시린 발을 부여잡고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는 격양되지도 않고 차분하고 은은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 해야 하는 것도 알고 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막상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모르겠으니까 미치겠는 거야. 거기에 삶을 안정적으로 끌고 가야 되는 책임도 가지고 있으니까 막상 그 모든 것들을 신경 쓰고 나면 나를 위해 투자하는 게 너무 지치고 힘들어지는 것 같아. 심지어 이런 얘기를 나눌 사람도 멘토도 없으니까 더더욱 힘들고. 마음을 먹어도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다가 다시 이전 삶으로 돌아오고. 이렇게 계속 반복되는 거지.


나는 끌려다니다가 죽는 삶을 살기는 싫거든. 나로 살아가고 싶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그걸 위해서 온라인 비즈니스나 글쓰기 같은 것들을 제작해보려고 계획하고 있고. 그런데 나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컨텐츠가 뭔지를 잘 모르겠어.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무척이나 막막하고.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뭔지 알아? 내가 지금 뱉어내는 이 모든 말들이 전부 핑곗거리에 불과하다는 거야. 사실 나는 그걸 해내야 할 만큼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까 이 안정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쳇바퀴 돌 듯이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그 작은 안정감에서부터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어. 나름의 노력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과들이 변변찮은 그 노력들에서도 ‘무언가 하고 있으니까 됐어’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나아가지 못하기도 하고.”


그렇게 우리는 한참이나 위기감에 대해서 떠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일궈온 사소하지만 너무도 소중한 결과들은 모두 위기의식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등학교를 입학과 동시에 그만둔 뒤로는 꽤나 오랜 시간 어딘가에 정확히 소속되지 않은 채로 살아왔다. 경영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스페인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수업들이 더 이상 무의미해져 필요성을 잃고 또다시 학교를 그만뒀다. 그 뒤로는 혼자 사업을 시작하고 개인적인 작업들을 만들어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소속감이 없다는 사실이 처음엔 좋았다. 완벽한 자유로움. 누군가는 해가 뜨기도 전에 잠에서 일어나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발을 구르다가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버스 안에서 한참을 움직여 공부를 하러 갈 때 나는 여전히 꿈에서 가보지 못한 세상에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을 자유롭게 정해 쓸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면 됐으니 말이다. 어떤 때는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지 않기도 하고 어떤 때는 창밖이 밝아올 때까지 책을 읽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날들이 하루 이틀을 넘어 몇 달이 되니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어딘가에 속해 시스템이 만든 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결과를 만들어내고 발전하는 것처럼 보인 반면 나는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며 이렇다 할 결과도 없이 흥청망청 주어진 기회들을 날려 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이렇게 살다가는 얼마 못 가 땅을 치고 후회하겠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모든 걸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은 이내 모든 걸 내가 해내야만 하는 족쇄가 되었고, 이는 끊임없이 나를 옥죄어 ‘해내야 한다. 해내야 한다’며 강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주체적인 안정감을 위해선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필요 이상으로 의미 있게 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닥치는 대로 모든 걸 해보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에 갔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 나를 던져놓았다. 강박증 속에 이런저런 일들을 해내다 보니 책을 출판하고, 전시를 열고, 많은 나라들을 구경하며 좋은 인맥을 다질 수 있게 됐다. 미약하지만 방에 앉아 배만 긁고 있던 과거를 생각하면 조금은 자랑스럽다. 이렇다 할 결과물들을 직접 만들어보고 나니 느꼈다. ‘가능하겠구나. 체계를 따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겠구나.’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얼마나 빠른 속도로 가고 힘은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라면 사는 게 막막한 것은 당연하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처음부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 지금 우리가 티비에서 보는 모든 유명인사들도 처음엔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위기의식 속에서 살지 않으면 죽겠다는 마음이 들자 몸이 움직였고 이젠 조금씩 길이 보이는 듯하다.


이 과정의 출발은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뤄내는 것이다. 크지 않아도 된다.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작은 일이라도 괜찮다. 어떤 일이든 내 힘으로 해낼 수 있는 목표를 세워 성취하는 것에서부터 우린 나아갈 힘을 얻는다.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작은 성취감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계획이라는 걸 세우고, 계획을 지킨다.


명확히 아는 게 없을지라도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들로 이야기를 꾸려가다 보면 문득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결과들이 생겨날 것이다. 책을 출판한다든지, 유튜브에 영상을 20개 올린다든지 하는 목표를 만들고 그것들에 몰입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것은 물론이고 현실적으로도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지만 가속도를 붙여줄 기폭제 같은 경험(앞서 언급한 작은 성취)을 한 차례 한 뒤 스스로의 힘으로 그걸 만들었다는 걸 실감하고 나면 그때부턴 자신에 대한 증명이 시작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갈피를 잡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다.


이 과정들이 꾸준하고 정확하게 반복되다 보면 주체적으로 이끄는 삶의 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때 꽤나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가 두 가지 정도가 있다. 주변 환경과 기록이 그것이다.


첫 번째로 환경. 우리는 언제나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데 이를 관리하는 것은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다. 물론 내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의 내 삶은 꽤나 많은 운이 따라줬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부모님을 만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배웠고, 좋은 은인들을 만나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좋은 친구들을 곁에 두어 끊이지 않는 원동력을 선물 받았다. 내 삶은 타인이 빚고 내가 조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나에게 사람이란 너무도 중요했다.


이렇게 내가 직,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인간들은 어떤 맥락에서든 나에게 영향을 준다. 이야기를 나누던 그 사람이 말했다. “직장을 다니는데 이런 얘기를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해.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런 사람들을 매일 만나니까 나조차도 그 문화에 동화되어 헷갈리기 시작하더라고.” 맞다. 오래 사귄 친구를 닮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인생과 닮아가려 무의식 중에 힘쓴다. 그렇기에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이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다. 먹 주변에 있으면 나 또한 검어지니 내가 닮고 싶은 색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내가 단정지은 바운더리 바깥으로 나와 보면 생각보다 자유롭게 자신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밖으로 나와 사람을 만나라. 나를 강하게 만들어줄 사람을 만나라.


두 번째는 기록이다. 나는 학교를 그만둔 뒤로 일기를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꾸준히 매일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려 애쓴다.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을 만큼 글과 친하지 않았던 내가 누군가의 추천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일기부터 시작해 시, 에세이, 일상 블로그, 노래 가사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을 쓰는 것에도 재미를 붙였고 그 모든 행위들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나를 조금씩 발전시켜주고 있다.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기록하는 행위가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 주기 때문이다.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흐려져 잊혀지기 마련이다. 경험할 때에는 정말 거대해 보인 일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희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련의 경험들을 지나며 우리는 우리의 입맛대로 과거를 각색하기도 한다. 하지 않았던 말을 했다고, 했던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착각하기도 하는 경험을 모두가 해봤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를 정확히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상에서 얻는 것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기록해 삶을 정확히 기억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놓아야 한다.


또한 기록은 앞으로의 선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모든 것들이 새롭게 시작되고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린 지난 지혜들을 현재로 꺼내와 미래의 선택을 고민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비단 나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인생 속에서 우린 근거를 얻고 그것은 기록에 의해서 한층 또렷해진다.


비슷한 맥락으로 기록은 ‘삶을 단단하게 살아가야겠다’ 생각하게 해주는 각성제가 되어주기도 한다. 최선을 다했던 지난날의 시간들을 보며 게을러지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나태했던 지난날을 보며 열심히 살아야겠다 다짐하게 만들어준다. 만약 똑같은 삶이 반복되는 것 같고 그게 싫다면 기록을 통해 내가 어떤 인간인지, 어떤 인간으로 살아왔는지 한 번 바라보자.


이렇게 기록에는 행위 자체에서도 그 내용에서도 얻을 수 있는 배움이 차고 넘친다.




이 말들을 그 사람에게 꺼내진 않았다.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조언을 주기엔 내 삶이 너무도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그저 잠자코 들었다.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그는 지금까지의 말을 정리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그 사람은 이미 알아야 할 것을 전부 알고 있었다. 단지 여러 이유들로 덮어놓고 외면했을 뿐. 나도, 우리도 똑같지 않을까. 무엇을 해야 할지, 지긋지긋한 헛손질을 그만두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린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신 술병들을 치우고 차갑지만 따뜻한 밤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인스타그램: @xyz_livelifeweir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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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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