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달력의 5월,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봤던 달력의 한 장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군입대 후 줄곧 제대하는 2001년의 5월을 손꼽아 기다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였고, 그 이후로는 제대하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여자친구도 사귀고,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일들을 꿈꾸고, 계획하며, 힘들 때마다 선임병들 몰래 달력을 들춰보았다.
“눈 감으면 깜깜하지? 그게 너의 앞으로 남은 군생활이야.”
“99년말에 지구 멸망한다는데, 너는 집에도 못 가보겠네.”
등등, 아예 그 날이 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면서 놀리는 선임병들의 눈을 피해, 전역하는 날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몇 주가 남았는지, 매일 계산했었다.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군대에만 있는 유명한 격언처럼 시간은 하루하루 느리지만 매일매일 지나갔다. 계절이 바뀌고, 진급을 하게 되고, 선임병들은 떠나고, 새로운 후임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시간이 빨리 흘러 가기만을 기다렸는데, 몇 개월이 지나고, 어느 정도 군생활이 적응이 되고 나니, 시간을 너무 허투루 쓰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나를 위해서 쓰는 시간은 하나도 없고, 학교 다니면서 배웠던 것들도 점점 잊혀버리지나 않을지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틈틈이 독서도 하고, 공부도 하였으나,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았다. 군복무만으로도 힘든 날들이었고, 제대만 해봐라, 정말 그 날부터 열심히 할 거다. 라는 다짐만 늘어갔다. 그리고, 힘이 들 때는 내가 진급할 날짜, 휴가, 공휴일 등등을 달력에 표시해가며, 위로를 받곤 했다.
제대할 때가 가까워지니까, 도리어 두렵고, 겁이 났다. 기쁠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제대할 때가 되니, 기쁨보다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 걱정이 생겼다. 잘 할 수 있을까? 그 때까지 내 달력에는 전역하는 날이 맨 마지막 목표였는데, 이젠 이 날이 새로운 시작날이 되었다.
전역하고,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표시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외국어 공부, 학교 공부, 도움이 될 취미나 운동, 운전 면허 취득 등등,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제대한 고참들 생각이 많이 났다. 전역을 마냥 기쁘게만 받아들이고, 아무 걱정없이 떠나는 사람도 있고, 정말 근심,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쓸쓸히 떠나는 사람이 있었다. 왜 그러는지 이해도 안 되고, 이해할 필요도 없었지만, 내 차례가 되니 이젠 다 알 것 같았다. 그저 달력에서 전역하는 날 이후에 ‘신나게 놀자’ 이렇게 써 놓기만 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근심, 걱정이 많은 길을 선택했다.
그게 도움이 되었는지 어땠는지, 그 후 나는 성실하게 공부도 하고, 계획했던 일들 대부분을 해냈다. 목표한데로 대기업에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들도 생겨났다. 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달력에는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가득하고, 위로가 될 특별한 날들이 표시 되어있다. 하지만, 대부분 남을 위한 날들이 대부분이다.
아이들의 생일, 소풍, 학예회, 회사에서 중요한 일들, 심지어 할부금이나, 대출 상환일자 모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해 줘야 하는 날들이고, 나를 위한 날들이 아니다. 나를 위한 날들은 점점 중요하지 않게 되어 가고 있다. 조금 서글프기도 한데,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올해는 저녁 10시에 애들 다 재우고, 와이프와 소파에서 TV보다가 오늘이 결혼 기념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젠, 아이들이나 부모님 중요한 날에 밀려서 정작, 우리나 나 자신의 기념일은 생각할 여유가 없어졌다.
그래도, 나는 달력을 보며, 해야 할 일들을 정하는 것이 재미있다.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미래가 가장 좋은 날들인 인생이었으면 좋겠다. ‘옛날에 내가 말이야. 정말 대단했다.’로 말을 꺼내는 노인이 되고 싶진 않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라고 말하면서 점점 늙어만 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책상위에 놓인 달력이 눈에 들어온다. 목표하는 삶,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테니 남은 날들에 행운이 가득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