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부산중구스토리공모전 입선
“동화책 한 번만 더 읽어주세요.”
나는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었다. 장난감 보다도 동화책을 더 좋아하였고, 항상 집안 어른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심하게 조르곤 했다. 당연히 학창시절 가장 큰 취미는 독서였고, 도서관이나 서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아버지께서도 독서를 좋아하셨는데, 자주 보수동 책방골목에 데리고 가서, 헌 책을 여러 권 사 주셨다. 주로 고전 소설이었다. 초등학생 때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삼국지’, 중학교 때는 ‘쿠오바디스’, 고등학교 때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모두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사서 읽은 책들이다.
보수동에 위치한 혜광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나는 더 자주 보수동 책방 골목을 지나다니게 되었다. 아직도, 학교를 마치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설레는 기분으로 책방 골목을 들어설 때의 기분을 잊지 않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분의기와 느낌이 있었다. 오래된 책 향기와 더불어 골목 입구의 분식집에서 만드는 여러가지 음식들의 냄새, 자전거와 수레, 리어카 바퀴소리, 여기저기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얼룩진 책들, 그 책들을 들춰내고, 뒤적이며, 흥정하는 소리, 나에게는 조용한 카페에 앉아서 듣는 여러가지 커피와 다과의 냄새와 백색 소음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학생, 참고서 필요한 거 있어? 싸게 해 줄게.”
“우리 가게에 웬만한 참고서 다 있어, 뭐 살 건지 일단 얘기나 해.”
학기 초에 이곳을 지나게 되면, 매번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참고서를 산 기억은 별로 없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90년대 중 후반, 그 당시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을 제외하고는 헌 참고서를 살 일이 없었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고 나서, 그 이전 학력고사 시절, 사용되던 참고서는 대부분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참고서는 안 삽니다.”
“그건 사봐야 팔리지도 않아. 이 책만 3000원 줄 수 있고, 나머지 책은 권 당 500원에 하지.”
수능을 마치고, 참고서를 몽땅 팔러 왔을 때, 문전 박대를 당하면서 들은 말들이다. 우리보다 딱 한 해 선배들은 참고서를 팔아서 나이트 클럽을 갔다는데, 나와 친구들은 생맥주 마실 돈도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 참고서를 사거나 파는 일은 드물었고, 주로 책방골목에서 고전소설을 사서 봤는데, 그런 헌 책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런 책을 어떻게 읽냐? 불편하지도 않냐?”
친구들이 이렇게 얘기한 이유는, 오래된 80년대 이전에 출판된 책들은 세로활자로 되어 있는 것들도 있었고, 군데군데 곰팡이 핀 것, 책벌레가 기어 나오는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서야 짧게는 일년, 길게는 삼 년만 쓰면 되지만, 다른 책들은 오랫동안 쓸 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싫어했지만, 그래도 책이라는 게 귀하게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집집마다 대백과사전, 우리말 큰 사전, 과학전집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친구들의 핀잔이 아무렇지 않았다. 물론 어린 마음에 새 책이 더 좋기는 했지만, 그리고, 헌 책 가격이 싸기 때문에 산 것이지만, 일단 책 속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새 책이나 헌 책이나 매한가지였다. 새 책이 특별히 더 큰 감동을 주지도 않고, 일단, 내용이 중요하지, 책 외관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헌 책을 읽다 보면, 책의 옛 주인들의 여러가지 흔적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써 내려간 편지가 한 장 숨겨져 있기도 하고, 꽃이나 나뭇잎을 말려서 책에 꽂혀 있기도 하고, 책에 자신의 이름을 정성 들여 적어 놓거나, 도장을 찍어 둔 경우도 많았다. 20년, 30년 정도된 오래된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면, 한 순간 그 오래 전 시간과 지금 내가 연결된 듯한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90년대 말이 그래도 보수동 책방골목이 마지막으로 활기찬 시절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발길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고, 몇 년 후 2000년대에는 이미 헌책 보다 새 책을 취급하는 서점들이 더 많아졌다. 인터넷의 보급, 그리고,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이제는 일부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책방골목에 와서 책을 살 일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헌 책을 종종 사긴 하지만,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게 훨씬 쉽고, 빠르고, 비용이 적게 드는 일이 되어버렸다. 또한 대형 서점들도 이제는 헌책을 팔고 있다. 책방골목에게는 정말로 미안하지만, 옛날과 같은 곳으로 다시 부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던 그 옛날 부산 중구에서 사라지거나, 예전만 못한 것은 비단 보수동 책방골목 하나만이 아니었다. 미화당 백화점, 광복동 고려당 빵집은 사라졌다. 대영극장, 국도극장, 부산극장, 이렇게 다른 극장들이 여럿 있어서, 종종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곤 했었다.
“야, 5시까지 대영극장 앞에서 만나자.” 이렇게 약속을 잡았었다.
지금은 모두 메가박스, CGV 이렇게 프랜차이즈 극장이 되어버려서, 극장을 약속 장소로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헛갈리기도 하고, 한 번 만에 위치를 설명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남포동 맥도날드 옆에 있는 극장으로 나와라, 아니 거기 말고, 지하철역 어디에서 가까운 맥도날드 옆.” 요즘은 이렇게 길게 설명해야 한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옛날 것들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보수동 책방골목을 지날 때마다, 오래된 서점 숫자는 줄어들고, 북카페나 공방 등 새로운 곳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는 것은 특별히 더 마음이 아프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책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나도 이유는 모르겠다.
“아빠, 여기는 뭐하는 곳이야?”
8살 우리 딸이 명절에 우연히 나와 책방골목을 걷다 물었다. 서점이 이렇게 줄지어 있는데, 뭐하는 곳이냐고 묻다니, 사실 처음에는 좀 어이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 아이의 눈에는 이 곳의 서점이 서점으로 안 보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마트만 알고 있는 아이가 전통시장을 처음 가게 된다면, 아마 같은 질문을 할 것 같다. 나는 최선을 다해 대답했지만, 아쉽게도 그날, 우리 딸을 이해시키지는 못하였다.